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난 1월 4일 국회와 기획재정부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1차 재난지원금을 넘어서는 규모의 재난지원금 지급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이 지사의 건의문. 사진=경기도 제공
[일요신문] 4인 가정의 가장인 A 씨는 최저임금 노동자다. 근로기준법 적용이 어려운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한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나은 보수를 주는 곳으로 이직하고 싶지만 낮은 학력과 40대라는 나이, 좋지 않은 건강으로 이직은 쉽지 않다.
A 씨 가정은 맞벌이로 근근이 살아왔지만 지난해 말 아내가 실직한 후 그의 180만 원 남짓한 소득으로 4인 가구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사회보험료를 제외하면 163만 원이 그의 통장에 찍힌다.
163만 원으로 국민임대주택 임대료와 임대 보증금 대출 이자까지 내면 나머지는 대부분 식비로 나간다. 임대료와 관리비, 통신비, 대출이자 등 고정 비용이 월 소득의 30%에 달하니 아이들에게 새 내복 한 벌 사주기 어렵다. 하지만 가장 괴로운 건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걸 맘 편히 사줄 수 없을 때다.
A 씨는 일회용 마스크도 며칠씩 쓴다. 싼 건 3장에 1000원밖에 안 하는 일회용 마스크지만 매일 새 걸 사 쓰기엔 부담스럽다고 그는 말한다. A 씨에게 마스크는 방역 효과를 보기 위한 용도라기보다 나라에서 쓰라고 해서 쓰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국민임대주택의 임대 보증금뿐인 자산과 180만 원 남짓한 소득은 기초생활수급자 기준에 부합한다. 하지만 A 씨는 수급자 신청을 하지 않았다. 아내가 다시 일을 구해 50만 원만 더 벌어도 수급 기준을 넘긴다는 것이 이유지만 그것보다 수급자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연차 수당도 없는 A 씨에게 지난해 5월 지급된 1차 재난지원금은 마른 땅의 단비 같았다. 4인 가족에게 지급된 100만 원의 재난지원금으로 그는 아이들 신발과 6년 동안 쓴 안경을 새로 바꿨다. 2차, 3차 재난지원금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는 자신의 얘기처럼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지난해 5월을 마지막으로 그에게 지급된 지원금은 없었다.
#재정건전성과 바꾼 가계부채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매출 감소를 견뎌내는 자영업자들의 어려움 못지않게 저소득층의 상황도 심각한 수준이다. 기초생활수급자와 달리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늘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낮은 신용 등급에 안정된 금융 자산도 없어, 때론 급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제2금융권을 넘어 사채까지 손을 대기도 한다. 정부의 거창한 주택 공급 정책보다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몇 푼의 돈이 더 시급한 것이 이들의 현실이다.
2차, 3차 재난지원금이 지급되는 동안 정부와 집권 여당은 “영업 제한을 겪는 자영업자가 더 어렵다”며 국민의 고통을 재단하고 줄을 세웠다. 그러다 보니 일반 국민은 뒷전으로 밀렸고 고용 안정성과 자산을 거의 보유하지 못한 저소득층의 삶은 더 어려워졌다. 한쪽에서는 코스피 지수 3000 돌파를 자축하고 서울 아파트 가격은 1년새 20% 넘게 올랐지만 가난한 국민들은 쌀과 라면을 사기 위해 빚을 내야 하는 형편이다.
1월 10일 국제금융협회가 지난달 집계한 주요국의 국가부채와 가계부채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우리나라 국가부채는 국내총생산 대비 45.9%로 집계됐다. 이는 선진국 평균인 131.4%의 3분의 1 수준이다.
반면 가계부채는 국내총생산 대비 100.6%로 사상 처음 100% 선을 넘어섰다. 같은 기간 미국은 81.2%, 선진국 평균은 78%, 50여 개국 평균은 65.3%밖에 안 됐다. 정부 재정은 부유한데 가계는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는 신호다.
그런데도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10일 “정부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므로 한정된 재원이라면 피해 계층을 선별해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재난지원금을 또 지급하려면 모두 적자 국채를 찍어 조달해야 하는데 국가신용등급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미래세대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정부 재정, 적자 국채, 국가신용등급 등 홍 부총리가 지난 1년간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레퍼토리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12일 “코로나19에 대응하면서 대다수 나라의 국가부채가 큰 폭으로 증가했고, 그 결과 가계부채는 줄어드는 경향이 뚜렷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국가부채는 찔끔 늘어난 대신 가계부채가 치솟고 있다. 다른 나라들이 곳간을 풀어 국민들을 살리는 동안, 곳간이 넉넉한 우리나라는 곳간을 지키기 위해 국민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며 “국민을 가난과 부채에 내몰고 유지하는 형식적 재정 건전성은 무의미하다”고 일갈했다.
빚에 짓눌린 사람들이 배를 곯다 먹을 것을 훔치는 ‘코로나 장발장’이 속출하고 경제적 이유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정부 여당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연초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고 경기 진작 필요가 생기면 재난지원금의 전 국민 지급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며 보편 지급 가능성을 열어뒀다. 11일에는 “고소득층 소득은 더 늘고 저소득층 소득은 오히려 줄어드는 케이(K)자 모양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다. 코로나로 많은 이득을 얻는 계층이나 업종이 피해가 큰 쪽을 돕는 다양한 방식을 우리 사회도 논의해볼 만하다”며 코로나 이익공유제 도입을 검토하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지난해까지 “더 어려운 분들에게 두텁게”라며 재정 당국을 옹호하던 더불어민주당도 6일 대변인을 통해 “전 국민 재난지원금은 위로를 넘어선 생존의 문제입니다. 국민이 살아야 재정 건전성이 있는 것입니다”라며 보편 지급 전망을 밝게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전 국민 재난지원금은 시기의 문제이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중론이 모인다는 후문이다. 다만 언제, 어떤 계기로 지급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금권선거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3차 재난지원금 지급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는 시각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김창의 경인본부 기자 ilyo2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