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이 2020년 3월 24일 서울 여의도 당사를 나서며 취재진 질문을 받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양정철 전 원장은 문재인 정부 탄생 일등공신이다. 2017년 대선이 끝난 후 그가 청와대에 입성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거론됐다. 하지만 양 전 원장은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해외로 출국했다. 양 전 원장이 주도해 만든 핵심 대선캠프 ‘광흥창팀’ 멤버들 대부분이 요직을 차지한 것과는 상반되는 행보였다. 임종석 초대 비서실장도 광흥창팀 소속이었다.
양 전 원장은 2019년 5월 민주당 싱크탱크 민주연구원장으로 복귀했다. 1년도 채 남지 않았던 2020년 4월 총선의 전략을 짜는 임무를 맡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민주당은 대승을 거뒀고, 양 전 원장 주가는 상승했다. 대선에 이어 총선 압승에까지 기여하자 ‘여권의 최고 선거 전략가’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이번에도 양 전 원장은 총선 대승을 뒤로하고 정치권과 거리를 뒀다.
양 전 원장 이름은 노영민 전 비서실장 교체설이 나돌 때마다 오르내렸다. 최측근인 양 전 원장이 마지막 비서실장을 맡아 문 대통령 임기 후반 국정운영을 돕고, 퇴임을 준비할 것이란 관측이었다. 특히 추미애-윤석열 갈등, 부동산, 백신 정책 등을 두고 비판이 고조되자 여론을 읽는 감각이 탁월한 양 전 원장 발탁이 급부상했다. 유영민 실장 발표 전까지 양정철 전 원장 임명을 점치는 보도가 쏟아졌다.
하지만 문 대통령 선택은 유영민이었다. 공교롭게도 비서실장 인사 며칠 뒤 양 전 원장 미국행 소식이 알려졌다. 양 전 원장이 인사에서 소위 ‘물을 먹었고’, 이에 대한 불만 표출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대선 전초전이자 문재인 정부 심판 성격의 4월 재보궐 선거를 코앞에 두고 ‘선거 전략가’ 양 전 원장이 출국한다는 점도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양 전 원장 주변에선 문 대통령에 대한 불만 섞인 목소리까지 새어나왔다.
논란이 불거지가 양 전 원장은 ‘정권에 부담을 주기 싫다’는 취지의 언급을 하며 진화에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친문 진영에서도 ‘소설 같은 얘기’라는 반응이 나온다. 한 친문 의원은 “양 전 원장은 애초부터 공직에 큰 욕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선 그 어떠한 직도 맡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다”면서 “비서실장설은 여의도에서 만들어낸 추측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청와대와 친문 인사들 말을 종합해보면 양 전 원장은 애초부터 비서실장 후보군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양 전 원장 발탁 가능성은 제로(0)였다”고 잘라 말했다. 친문 핵심으로 평가 받는 원외 인사도 “양 전 원장 이름이 나와 다소 의아했다. (청와대가) 전혀 검토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양 전 원장이 유영민 실장을 추천했다는 말도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1월 1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군사시설 보호구역 해제 및 완화 당정협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정치권에선 ‘양 전 원장이 후보군에 없었다’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실제 몇몇 친문 인사들은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양 전 원장을 밀었다고 한다. 통상 임기 후반기 대통령들이 국정 장악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측근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던 사례가 거론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은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양 전 원장의 비서실장설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정적 목소리가 더 많았다. 최측근을 통한 친정체제 구축보다는, 원만한 통합형 인사가 필요할 때라는 의견에 무게가 실렸다. 친문 핵심을 발탁할 경우 ‘친문 패권주의’에 대한 우려가 확산될 것이란 말도 뒤를 이었다. 양 전 원장 발탁이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앞서의 친문 원외 인사는 “인사는 대통령 고유의 권한이다. 우리가 짐작해 말 할 수 없다”면서도 “양 전 원장이 한 번 정도는 청와대에 들어올 법도 한데, 그러지 못한 부분은 당사자(문재인, 양정철)가 직접 입장을 내기 전까진, 계속해서 뒷말을 생산해낼 것”이라고 했다.
양 전 원장의 정치적 입지, 문 대통령과의 관계 등이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소 다른 것 아니냐는 분석이 고개를 든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한 친문 재선 의원은 “문 대통령 인사 스타일을 떠올려 봐라. ‘회전문’이라는 비판까지 들을 정도로 본인이 쓰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밀어 붙인다”면서 “양 전 원장이 공직에 뜻이 없다고 해도, 문 대통령이 부르면 과연 응하지 않았을까. 양 전 원장으로선 서운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손혜원 전 민주당 의원도 1월 13일 ‘손혜원 TV’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이후 양정철과의 연을 끊었다”고 주장했다. 손 전 의원은 “사실 대통령이 사람을 잘 버리지 않기에 양비(양정철)를 데리고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양비를 버리는 것을 보고 주변의 많은 사람이 조언했구나 싶었다”라고 덧붙였다. 이어 “이 사람이 미국에 간다면 자의반 타의반이 아니라 순전히 자의로 가는 것이고, 조용히 있다가 다시 스멀스멀 기어들어 올 것”라고 했다.
정가의 관심은 양 전 원장이 내년 대선을 앞두고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모아진다. 양 전 원장과 가까운 정치권 인사는 “아직 정해진 게 없다고 보면 된다. 대선이 끝나고 난 뒤 돌아올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여의도가 양 전 원장을 그냥 두진 않을 것이다.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다는 말이 맞다 하더라도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분명 있다. 개인적 역량, 친문 진영에서의 지분 등 때문이다”라고 귀띔했다.
그동안 여권 내부에선 양 전 원장이 이재명 경기지사와 손잡는 것 아니냐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최근 들어 이 지사는 친문계와의 대립각이 더욱 선명해지는 모양새다. 친문 색채가 강한 민주당 권리당원 게시판에서 실시된 투표에선 이 지사 출당 찬성표가 압도적으로 나왔다. 양 전 원장 역시 친문 내부에서의 위상이 예전만 못한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처지만 놓고 보면 둘이 한 배를 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민주당 한 중진 의원 말이다.
“지지율 1위인 이재명 지사의 고민은 당내 경선에서 이길 수 있느냐다. 양 전 원장과 연대하면 승률은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무관의 실세’로 불리는 양 전 원장 역시 유력 차기 주자 이 지사를 통해 다시 한 번 ‘킹메이커’ 능력을 보일 수 있다. 반면 이 지사에게 양 전 원장은 친문 실세일 때 가장 매력적이다. 친문 지지를 끌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 전 원장을 두고 나오는 소문은 이 지사로서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예전엔 양 전 원장이 관계의 키를 쥐고 있었다면, 이젠 이 지사가 쥐게 될 것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