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생명이 제판분리를 위한 자회사 설립을 추진하면서 직원들과 갈등을 겪고 있다. 서울 중구 한화빌딩. 사진=박정훈 기자
#보험업계 수익 악화 속 GA 자회사 설립 가속화
업황 부진 속 보험업계의 제판분리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각 보험사는 자사의 핵심역량, 영업조직 운영성과 평가, 영업조직 운영형태별 장·단점에 기초해 △법인보험대리점(GA) 설립 △모집조직 분사 △모집기능 완전분리 등을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 보험업계는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대유행) 이전부터 저성장·저출산·저금리의 삼중고를 겪고 있다. 최근 5년 생명보험산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0%대에 머물러 있다. 2019년 국내 보험사의 수익은 최근 10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국내 가구당 평균 가입 보험상품이 12개에 달하는 상황에서 신규 고객을 유치하기도 쉽지 않다. 개인보험은 2016년 이후 역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사상 초유의 0%대 금리로 보험사의 자산운용 수익률이 낮아졌고, 향후 개선 여부도 불투명하다.
위기 상황 속 네이버·카카오 등 강력한 경쟁자들이 보험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지난해 7월 네이버파이낸셜은 NF보험서비스를 설립했다. 지난해 12월 카카오페이는 금융당국에 디지털 손보사 설립 예비인가를 신청했다. 올해 하반기 최종 승인을 받아 출범하기 위해서 예비인가 승인, 법인 설립, 본허가 승인 등의 행정 절차를 밟을 계획이다.
결국 벼랑 끝에 선 보험사들이 제판분리를 위해 GA 자회사 추진에 나서고 있다. 미래에셋생명은 채널혁신추진단을 출범하고 자사 전속설계사 3300여 명을 자회사형 GA인 ‘미래에셋금융서비스’로 이동시켜 제판분리에 나선다고 밝혔다. 하만덕 미래에셋생명 부회장을 미래에셋금융서비스 대표로 선임해 제판분리에 힘을 실었다. 오는 3월 최종 개편 마무리가 목표다.
한화생명은 ‘한화생명 금융서비스(주)’(가칭)를 100% 자회사로 설립할 예정이다. 설립 방식은 한화생명 내 전속 판매채널을 물적분할로 분사하는 형태다. 540여 개의 영업기관, 1400여 명의 임직원, 설계사 2만 명에 달하는 판매 전문회사로 탈바꿈한다. 특히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차남 김동원 전무가 한화생명의 전략수립을 지휘하고 있다. 오는 3월 주주총회를 거쳐 4월 1일 출범이 목표다
생명보험뿐만 아니라 손해보험사도 제판분리 도입 초읽기에 들어갔다. 지난해 12월 KB손해보험은 경력 3년 이상의 지점장 약 150명에게 ‘사업가형 지점장’을 모집한다고 공고했다. 앞서 미래에셋생명과 한화생명이 추진하는 GA 자회사도 정규직 직원을 사업가형 지점장으로 변경할 예정이다. 현대해상과 하나손해보험도 자회사 GA 설립을 예고했다.
GA 자회사 추진 배경으로 영업 강화와 비용 절감이 꼽힌다. 그동안 GA들은 고액 수수료를 통해 본사 전속설계사를 뺏어왔다. GA 설계사는 전속설계사보다 대략 월 납입 보험료의 200~400%를 더 받았다. 보험사는 GA를 통해 설계사 조직을 강화하는 동시에 타사 상품까지 취급할 수 있게 돼 영업 폭이 넓어진다. 또 본사는 정규직 지점장을 개인사업자 및 계약직인 사업가형 지점장제로 변경하면 임차료와 인건비, 전산비 등의 필수운영경비 감축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영업력 강화와 비용 절감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셈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보험시장이 포화 상태인 만큼 경쟁도 치열하고 영업도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이런 와중에 GA 수가 계속 늘어나면서 본사 영업력이 악화되고 있다”며 “이럴 바엔 본사가 자회사 GA를 설립해 취급상품을 다양화하고 마케팅, 영업 등을 강화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에셋생명 노조는 파업을 위한 쟁의조정을 신청한 후 사측에 제판분리를 하더라도 고용안정을 위한 협약서를 체결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사진=허일권 기자
#노사갈등 봉합 가능할까
하지만 GA 자회사 도입을 두고 보험설계사 노동조합은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래에셋생명 노조는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에 쟁의조정을 신청했다. 노조는 제판분리를 하더라도 정규직 직원들의 고용안정을 위한 협약서 체결을 요구하고 있다. 1월 7일 중노위의 노사 간 1차 조정회의에서 합의안을 도출하지 못하면서 오는 1월 18일 2차 조정회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회의에서 합의되지 않는다면 노조는 쟁의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노조는 서울 여의도 미래에셋생명 본사 앞에서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여승주 한화생명 사장은 사내방송을 통해 자회사를 설립해도 인력 구조조정이나 임직원의 급여 및 복리 후생이 줄어드는 일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본사가 지점장들에게 자회사 출범에 우호적인 직원 현황을 파악토록 하는 문서가 발견되고 자회사 설립 찬성을 종용하면서 갈등은 깊어졌다.
한화생명 노조는 “조합원을 타 회사로 전직시키려면 노조의 동의를 얻도록 하는 고용안정대책조항이 단체협약으로 보장됐다”며 “조합원에게 자회사 전직을 강요하면 단협 위반행위로 규정해 강력하게 대응하겠다”고 이틀간 경고파업을 진행했다. 한화생명 관계자는 “노사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3주간 영업조직 분리 등 모든 현안에 대해 원점에서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만 해명했다.
1월 4일 김기환 사장이 새로운 대표로 취임하자마자 KB손해보험 노조는 임원실 앞을 점거하고 출근 저지 투쟁을 벌였다. 노조는 “GA프런티어 지점장 모집은 고용안정협약 위반이자 사실상 일방적 희망퇴직”이라며 “노사 신뢰 훼손 문제와 인사 발령, 임금피크제 등의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사무금융노조 보험설계사지부도 보험사들의 자회사형 GA 설립이 조직 구조조정을 위한 발판이 될 것이라며 비판하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지점장들은 GA 자회사로 이동하고 비정규직으로 전환된다면 성과주의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고 토로한다. 코로나19로 대면 영업이 어려운 상황에서 실적이 나지 않으면 바로 계약해지를 당할 수도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한화생명 한 지점장은 “대기업이라는 자부심을 안고 살아가던 직원들을 강제로 판매 자회사로 내모는 부당한 현실을 맞닥뜨리게 됐다”고 현 상황을 설명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