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이의 이름과 얼굴은 공개돼도 괜찮을까. ‘정인이 사건’은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경찰의 안일한 대처, 잔혹한 학대 내용 그리고 결정적으로 방긋 웃는 정인이의 눈은 시민들 마음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결국 정인이 양모는 ‘아동학대치사죄’에서 ‘살인죄’ 혐의를 받게 됐다. 정인이 이름과 얼굴 공개는 ‘좋은 결과’를 낳은 셈이다. 하지만 우리 누구도 정인이에게 이름과 얼굴을 공개해도 되는지 묻지 않았고, 허락을 받지 않았다. 정인이는 하늘나라에서 이 상황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일요신문] “OO아 미안해”, 8년 전 2013년 12월 11일 A 양의 49재가 열린 날 분노와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이 울산시 울주군 구영공원에 모였다. A 양은 2013년 10월 24일 친아빠의 동거녀였던 의붓엄마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한 뒤 죽었다. 학교 소풍을 가고 싶어 했다는 이유였다. 사망 당시 양쪽 갈비뼈가 16곳이 골절된 상태였다. A 양은 초등학생 2학년이었다. 2011년 아동학대를 의심했던 어린이집 교사가 아동보호기관에 신고했지만 분리 조치가 이뤄지진 않았다.
2014년 6월 11일 부산고등법원 앞에서 아동학대예방을 위한 ‘하늘로 소풍한 아이를 위한 모임’ 회원들이 ‘울산 여아 아동학대 사망 사건’의 피해자 A 양을 추모하는 동시에 계모 박 아무개 씨에게 법정 최고형 선고를 해달라며 아동학대 사진전을 열고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인아 미안해”, 8년이 흐른 2021년 1월 13일 정인이 양모의 첫 재판이 있던 날 분노와 안타까움을 느낌 시민들이 서울남부지방법원 앞에 모였다. 정인이는 2020년 10월 13일 양모의 학대 끝에 죽었다. 췌장이 끊어지고, 갈비뼈, 어깨뼈 등 7곳에서 골절 흔적이 발견됐다. 사망 직전 9kg 아이의 배엔 피가 600ml나 고여 있었다. 생후 16개월 정인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 차례나 아동학대 의심 신고가 있었지만 분리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
#‘A 양 사건’에서 ‘울산 학대 사건’으로, ‘양천 학대 사건’에서 ‘정인이 사건’으로
8년 전 시민들은 울산지방법원 앞에서 의붓엄마 박 아무개 씨를 엄벌해달라는 릴레이 1인 시위를 했다. 아동학대 특례법 제정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수만 장 모으기도 했다. 시민들의 관심이 모이자 당시 검찰은 이례적으로 의붓엄마 박 씨를 ‘학대치사죄’가 아닌 ‘살인죄’로 기소했다.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지만 1심과 2심을 거쳐 박 씨는 징역 18년을 선고받았다.
8년 뒤 시민들은 남부지방법원 앞에서 양모 장 아무개 씨를 엄벌해달라는 구호를 외쳤다. 양모 장 씨를 ‘아동학대치사죄’로 기소했던 검찰은 시민들의 관심이 모이자 혐의를 ‘살인죄’로 변경했다. 장 씨의 변호사는 장 씨가 정인이를 폭행한 건 인정하지만 살인의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2021년 1월 13일 정인이 사건 관련, 양모 장 아무개 씨에 대한 첫 재판이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있었다. 법원 앞엔 분노한 시민들로 가득했다. “사형시켜라”는 외침이 울려퍼졌다. 사진=박현광 기자
시민들의 분노는 결실을 맺었지만 후폭풍도 거셌다. 당시 언론은 A 양의 실명을 공개하고 ‘A 양 사건’이라 불렀다. A 양의 이름을 공개하고 ‘A 양 사건’이라며 사건을 피해자 중심으로 부른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피해 아동 신상이 공개될 경우 2차 피해와 아동 인권이 훼손될 우려가 컸다. 이후 ‘A 양 사건’은 ‘울산 여아 아동학대 사망 사건’으로 불리게 됐다.
시민들의 분노는 결실을 맺었지만 ‘울산 여아 아동학대 사망 사건’ 이후 만들어진 법과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정인이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한 건 1월 5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이었다. 법원 앞에 나온 시민들은 정인이가 활짝 웃는 사진이 담긴 피켓을 들었다. ‘양천 입양 아동학대 사망 사건’은 ‘정인이 사건’으로 불리게 됐다.
#‘피해 아동 신상 보호’ 과거와 현재
8년 전 피해 아동 신상을 보호하는 조항은 법으로 만들어졌다. ‘울산 여아 아동학대 사망 사건’을 발단으로 2014년 만들어진 ‘아동학대범죄처벌등에관한특례법’(아동학대처벌법)은 ‘아동학대치사죄’를 새로 만들고 학대로 아동을 사망하게 한 가해자를 최고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동시에 학대 피해 아동의 신상 정보를 공개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조항도 추가했다.
8년 뒤 피해 아동 신상을 보호하는 법 조항이 있지만 이를 언급하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정인이의 신상 공개는 정인이를 위한다는 말과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다. 정익중 이화여자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는 “아이가 생존해 있다면 절대 (신상 정보 공개를) 해선 안 되지만 사망한 사건이라면 공익의 목적에서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정인이 사진을 보지 않았다면 상태를 몰랐고, 말로만 들어선 와 닿지 않았을 것 같다”며 “(정인이 신상 공개는) 공익 목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죽은 정인이를 대변할 법률 대리인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전했다.
정인이를 비롯해 아동학대로 사망한 아이들의 이름과 얼굴이 담긴 영정 사진이 남부지방법원 앞에 놓였다. 사진=박현광 기자
아동학대처벌법 35조 2항은 학대 피해 아동은 물론 가해자, 고소인의 이름이나 용모 등 신상을 공개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이를 어기는 자는 같은 법 62조에 따라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가해자의 신상까지 보호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동학대 범죄 특성상 가해자의 신상이 공개되면 피해자의 신상이 드러나고, 또 학대 피해 아동이 아닌 다른 자녀들에게 2차 피해가 갈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정인이 사건 같은 경우 특수성이 있다. 정인이가 이미 사망했고, 가해자가 양부모이기 때문에 정인이 신상을 공개한다고 해서 2차 피해를 볼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고, 보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사회의 공익이 크다는 점에서 (신상 공개가) 가능할 수도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8년 전 진통 끝에 아동학대 사건에서 피해 아동의 신상을 공개하지 않는 건 첫 번째 원칙이 됐다. 한국기자협회는 보도준칙 7장(어린이와 청소년 인권)에서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익명성을 보장하고 피해 상황과 관련한 사진과 영상은 원칙적으로 공개하지 않는다’고 정했다. 유니세프(UNICEF)의 ‘아동 취재 가이드라인’의 내용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정인이 사건’ 방송을 제작한 이동원 SBS PD는 최근 SBS라디오 ‘이철희의 정치쇼’에 출연해 정인이 신상을 공개한 이유를 밝혔다. 이 PD는 “방송에 모자이크 처리를 해서 얼굴을 가린다고 하면 상처 부위를 보여줘야 하는데, 상처 부위들을 합하다 보니까 얼굴 대부분이 완성됐다”며 “아동 학대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교수 등이 ‘이렇게까지 되면 정보를 공개하는 게 정인이나 사회를 위해서 낫지 않겠냐’고 조언해줬다”고 설명했다.
2021년 1월 13일 서울남부지방법원 앞 전국 각지의 시민들은 근조화한을 보내 정인이를 추모했다. 사진=박현광 기자
보건복지부는 2018년 6월 ‘아동학대 사건 보도 권고 기준’을 만들었다. 보건복지부 자료집은 피해 아동 신상 공개 금지는 물론 ‘학대 방법에 관한 상세한 묘사와 재연, 학대 관련 사진이나 영상 노출을 피해야 한다. 범죄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라도 구체적 장면 노출은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고 설명한다. 또 주변인 인터뷰를 자제하고 피해자 위주의 아동학대 사건 지칭을 금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론에 힘입은 언론은 정인이 관련 보도를 쏟아냈다. 학대 장면이 담긴 영상을 집요하게 찾았다. 이웃, 어린이집 교사, 응급실 의사 등 정인이 상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내보내고 옷깃을 매만지거나 울지 않는 정인이의 행동을 분석했다. 정인이 신상 공개 이전에 가명과 모자이크를 택했던 언론 또한 정인이 이름과 얼굴을 공개했다. 물론 정인이라는 이름은 입양되기 전 불리던 이름이라 완전히 실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찌 됐든 우리 사회는 정인이의 모든 것을 알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경희 천사들의둥지 대표는 “8년 전 A 양 사건 때와 똑같은 양상이다. 그땐 언론에 A 양 이름이 공개됐던 게 문제가 됐다. 법도 만들어지고 보도준칙도 생겼는데 이번엔 정인이 얼굴이 공개됐다. 거꾸로 퇴행하고 있다”며 “A 양 사건 때 나도 피켓 들고 시위했던 사람으로 시민들의 분노는 이해한다. 하지만 정인이 얼굴을 계속 노출하는 게 옳은 일인가 생각해 볼 문제다. 정인이 얼굴을 노출하지 않고도 여론을 형성하고 재판부를 압박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관련기사 정인이가 어른이었어도 얼굴 공개했을까).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