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그룹 구조조정이 9부 능선을 넘었다. 사진=연합뉴스
멀게만 보였던 두산그룹 구조조정이 터널 끝에 닿았다. 그룹 전체를 짓누르는 유동성 위기로 그룹 전반을 뜯어내 재편해야 했던 1년 전 상황을 돌이켜 보면 속도와 내용 측면에서 합격점이라는 것이 투자은행(IB)업계 전반적인 평가다.
두산그룹은 구조조정을 시작하며 두산중공업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를 팔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실제 그룹 내 핵심, 또는 미래를 책임질 계열사와 자산들을 과감히 매각했다. 최근 구조조정의 마지막 퍼즐로 통하며 매각 성사 가능성이 높아진 두산인프라코어(8000억 원)와 클럽모우CC(1850억 원), 모트롤BG(4530억 원), 네오플럭스(730억 원), 그룹의 상징 두산타워(8000억 원) 매각 자금을 모두 더하면 총 2조 2000억 원에 달한다. 여기에 2020년 12월 초 두산중공업은 1조 30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앞서 두산그룹은 2020년 4월 KDB산업은행 등 채권단으로부터 3조 6000억 원을 수혈받고 3조 원 규모의 자구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계열사·자산 매각 자금과 유상증자를 더하면 목표했던 이상의 성과를 달성하는 셈이다.
그러나 최근 업계 일각에선 두산그룹의 구조조정을 두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자구안을 통해 마련된 자금이 기존 채무를 갚기에도 빠듯한 데다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IB업계 관계자는 “두산이 나름 실속을 챙기고 그룹 재편에도 성공했지만, 핵심 사업부를 내어준 탓에 2021년 다시 어려워질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 계열사와 자산 매각 등으로 확보한 2조 2000억 원 가운데 일부는 빚 갚는 데 활용되지 못한다. 두산타워 매각 금액은 8000억 원이지만 4000억 원대 담보가 설정돼 있다. 담보 및 세금 등 비용을 제외하면 두산이 가져가는 현금은 2000억 원 수준이다.
두산인프라코어의 경우 1조 원의 우발채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 탓에 최대 걸림돌로 작용했던 두산인프라코어차이나(DICC) 소송 문제가 최근 두산이 사실상 승소하면서 일단락된 모양새지만, 아직도 변수가 남아있다. 소송 상대방인 재무적 투자자들이 동반매도청구권을 행사해 DICC 지분 100%에 대한 제3자 매각을 추진할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자구안 이행이 급한 두산그룹이 협상을 하거나, 인프라코어 인수 작업 조기 종결을 위해 현대중공업이 재무적 투자자들과 협상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나오지만, 최악의 경우 매각이 미뤄질 수 있다는 점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이 때문에 IB업계 시선이 두산밥캣과 두산퓨얼셀로 모이고 있다. 이미 팔 수 있는 것은 다 판 두산에 ‘돈 되는’ 계열사는 두 곳밖에 없다는 것이다. 밥캣과 퓨얼셀 모두 구조조정 초기부터 유력 매각 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특히 최근 매각설이 다시 조심스레 피어오르며 관심을 받고 있는 건 두산밥캣이다. 두산은 지난해 채권단에 자구안을 제출할 때 두산인프라코어를 연말까지 매각하고, 필요하면 2021년 상반기 두산밥캣을 매각하겠다는 내용을 포함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산밥캣의 모회사이자 함께 시너지를 내고 있던 인프라코어가 팔린 만큼 두산이 계열사를 추가 매각한다면 밥캣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두산그룹 자구안 이행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남아있는 두 핵심 계열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그러나 두산이 아무리 어려워져도 밥캣은 매각하지 않고, 하지도 못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두산은 구조조정 이후 그룹 정체성을 친환경 에너지 공급 사업에 맞추고 핵심 사업을 신재생에너지 등으로 바꾸겠다는 비전을 내놨다.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사업이라 전망이 밝지만, 정부 정책과 세계 트렌드 등 변수가 많은 사업으로 꼽히기도 한다. 두산의 이 사업 관련 계열사들은 이제 막 자리를 잡거나 착수 단계라 수익을 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 이전까지 채무 상환과 이자 부담을 포함해 그룹을 지탱해줄 ‘캐시카우’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밥캣이라는 해석이다. 실제 밥캣은 이미 2019년부터 매출과 영업이익에서 기존 ‘캐시카우’로 분류됐던 두산인프라코어를 앞서기 시작했다. 두산그룹 지배구조는 ‘(주)두산→두산중공업→두산인프라코어→두산밥캣’이다. 말단에 있는 계열사가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산인프라코어가 매각되면 두산밥캣은 두산중공업 자회사로 편입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이 경우 2010년대 이후 줄곧 실적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두산중공업에 없어서는 안 될 계열사가 된다. 이 때문에 업계 일각에선 두산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가장 잘한 일은 밥캣을 남겨 놓은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두산퓨얼셀은 이미 그룹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퓨얼셀의 주력 사업은 수소와 산소의 전기화학 반응을 활용한 연료전지다. 수소 연료전지로 불리는 이 에너지원은 연소과정이 없어 산화물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두산이 가진 계열사 가운데 친환경 에너지 공급 사업의 선두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정부 역시 수소 경제 활성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어 퓨얼셀은 두산중공업과 함께 미래 두산의 중심 역할을 할 전망이다.
두산퓨얼셀은 현재 수소 외에도 LPG(액화석유가스)와 천연가스 등을 원료로 하는 연료전지 사업도 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는 거래처가 공고하고 수익도 내고 있다. 한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구조조정 초기 두산의 미래 사업 관련 계열사 가운데 가장 관심을 받았던 건 두산솔루스와 퓨얼셀 두 곳이었다. 솔루스가 유망 사업인 전기차배터리 소재 사업을 하는 데도 이를 매각하고 퓨얼셀을 남긴 것”이라며 “향후 두산그룹의 중심은 여전히 중공업이겠지만, 퓨얼셀이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두산의 명운을 쥐고 있는 채권단은 두산그룹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는 사실에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구조조정 성과가 나쁘지 않고, 두산중공업 유상증자에 투자자들이 호의적으로 참여하는 모습도 의미 있게 지켜봤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현재 두산의 채무 대부분은 국책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이다. 채권단은 두산의 자구 노력이 인정되면 대출 상환금을 연장해주겠다고 밝힌 바 있다. IB업계에선 앞서의 과정들이 두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되는 만큼 채권단이 급하게 빚을 갚지 않도록 하는 형태로 지원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IB업계 다른 관계자는 “최근 두산에 남은 두 계열사의 전망이 엇갈리고 있지만, 두산으로서는 절대 버릴 수 없는 카드들”이라며 “추가 매각이 이뤄진다면 그동안 거론돼 왔던 라데나CC, 두산메카텍, 산업차량BG 등이 우선 대상에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두산그룹 관계자는 “두산밥캣은 매각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며 “자구안을 마무리하면서 재무개선뿐만 아니라 사업구조 개편과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