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최근 2~3년간 1970년대생 젊은 총수로 바뀐 현대차나 LG, 한진, DB 등의 임직원들은 공통적으로 “젊은 총수는 과감하고, 결단이 빠르다”고 설명한다. 사례도 많다. 현대차그룹의 로봇기업 보스턴 다이나믹스 인수, 애플카 협업이나 LG의 자동차 부품업체 마그마와 합작, 인도네시아 11조 원 배터리 생산 투자, LG에너지솔루션 분할 및 상장 등이 전광석화처럼 진행되고 있다. 모두 예전 같았으면 이익과 손실을 따지느라 몇 개월이 걸릴 수 있는 사안들이다. 5대 그룹 총수가 함께 만나 사업을 논의하는 일도 반복되고 있다.
국내 주요 그룹들이 총수 세대교체를 마치고 대대적인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가운데, 비주력 계열사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정반대로 사업 포기 또한 과감히 이뤄지는 분위기다. LG전자의 MC사업부 매각 혹은 포기설이 대표적이다. LG전자의 MC사업본부 매각설은 지난 1월 20일 권봉석 LG전자 사장이 직원들에게 보낸 사내 이메일을 통해 공식화됐다. 권 사장은 이 이메일에서 “MC사업본부의 사업 운영 방향이 어떻게 정해지더라도 원칙적으로 구성원의 고용은 유지되니 불안해할 필요 없다”고 전했다. LG전자 한 관계자는 “소문은 계속 무성했는데, 그래도 계속 들고 갈 줄 알았다. 사실상 인정하는 듯한 대표이사의 이메일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잘나가는 곳에 집중” 비주력 계열사는 매각설
최근 현대차는 전략부서 내에서 현대제철 매각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회사 측은 사실이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설령 매각 가능성을 언급했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단계는 아니라는 설명이다. 지난 연말 이후 철강 업황이 빠른 속도로 개선되고 있어 한때 논의를 했어도 현재는 잠잠해졌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이와 함께 현대로템 매각설도 나오곤 했는데, 마찬가지로 당장 추진하는 단계는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현대제철, 현대로템 등 비주력 계열사는 계속해서 매각설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현대차 내부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전기차, 수소차 등 미래차 시장을 잡으려면 대규모 투자가 필수이기 때문에 수시로 ‘현금화’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란 얘기다. 특히 현대로템 방산부문은 저수익에 고전하고 있어 마땅한 인수자가 나타나면 팔 수 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현대제철은 실제로도 저수익 사업부문을 포기하는 구조조정을 실시 중이다.
삼성도 마찬가지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삼성물산 건설부문, 패션부문, 제일기획, 삼성증권 등 비주력 계열사가 수시로 매각설에 휘말렸고, 일부는 그룹 측도 사실을 인정했다. 삼성은 오히려 마땅히 살 만한 곳이 없어서 구조조정을 못한다고 봐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법 이슈가 끝나면 삼성그룹 또한 구조 재편에 착수하지 않겠느냐고 보는 관계자들이 많다”면서 “재계 전반적으로 구조조정에 관심이 많아 상당한 수준의 손 바뀜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주 매각설에 시달리는 한 대기업 관계자는 “40대, 50대 직원들이야 어디로 넘어가든 큰 상관이 없다는 분위기지만 젊은 직원들은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하곤 한다”면서 “최근 경력직 직원을 채용했는데, 면접에서 매각설에 대해 묻는 응시자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사라져가는 선단식 경영
과거에는 달랐다. 선대 회장들은 ‘덩치 불리기’에 관심이 많았다. 예전에는 이익이 나지 않더라도 소위 그럴듯해 보이는 사업이라면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자동차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고 이건희 회장이 주위를 반대를 무릅쓰고 삼성자동차를 설립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이건희 회장은 한 대를 팔 때마다 150만 원 손실이 나는 자동차 사업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지만, 금융당국과 채권단의 계속되는 요구에 결국 자동차 사업을 매각해야 했다. 건설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유동성 위기를 겪고 좌초하는 기업들도 많았다.
선단식 경영은 선대 경영진들의 특징이다. 선단식 경영이란 재벌 그룹들이 주력 기업을 중심으로 확장을 거듭해 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형태를 선단(船團)에 빗대 표현한 말이다. 자동차 회사였던 현대차가 계열사로부터 철강을 공급받겠다며 현대제철을 설립하고, 현대건설이 짓는 아파트에 엘리베이터를 넣어야 한다며 현대엘리베이터를 설립하는 식이다. 물류와 광고 등의 연관 사업 또한 재벌 기업이라면 누구나 계열사를 설립해 자체적으로 추진했다. 다른 대기업과 손을 잡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저성장 사회에 접어들면서 과거와 달리 선단식 경영 자체가 그룹에 짐이 되고 있다. 낮은 수익성 때문에 단가를 놓고 계열사끼리 다투는 경우만 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최근의 젊은 총수들은 확장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전자만 경영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고, ‘카 가이’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또한 자동차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드러냈다.
구광모 회장의 LG그룹이 사실상 휴대폰을 포기할 수 있다고 한 것 또한 비슷한 경우다. LG전자는 한때 초콜릿폰, 프라다폰 등으로 인기를 끌었고, 지금도 LG전자의 브랜드 이미지에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돈이 되지 않는다. 2019년 기준으로 MC사업본부는 LG전자 매출의 9.6%를 차지했지만, 영업이익 부문은 마이너스(-) 40%를 기록했다. 벌어들인 돈의 절반을 휴대폰에서 까먹고 있으니 도저히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23분기 연속 적자에, 누적 적자는 5조 원에 달한다. 앞서의 LG전자 관계자는 “젊은 총수이기에 내릴 수 있는 결단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민영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