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의 자식이냐, 상놈의 자식이냐에 따라 팔자가 달라지던 시절이 있었다. 혈통을 증명하는 ‘족보’가 반상(班常)의 신분을 결정하고 벼슬길을 좌지우지하던 마패였다. 혈통이 사주팔자를 결정하는 신분사회에서는 재력과 권력을 획득하거나 공직에 진출해 지배계급으로 자리를 굳히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증명서가 바로 어느 양반 집안의 누구 자식이냐를 증명해 주는 ‘족보’였다.
봉건질서가 무너지고 학력사회로 들어서면서 족보 대신 어디서 어떤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를 증명해주는 학력증명서가 개인의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는 마패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학력이라는 것이 중·고등학교냐 대학교냐 교육단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졸업장, 같은 자격증이라도 어디에 있는 어느 대학의 졸업장이냐에 따라 신분결정이 천양지차로 달라진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에는 4년제 일반 대학교만 해도 177개교나 된다. 여기에 전문대학까지 합치면 무려 340여 개의 대학에서 매년 60만 명에 가까운 인재를 신입생으로 뽑고 있다. 앞으로 몇 년 안 가 대학입학 적령(適齡)인 만 18세 인구가 전체 대학 신입생 모집 정원보다 적을 것이라는 통계도 있다. 통계숫자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대학 입시 과열경쟁이 있을 이유가 없다. 입학자격만 갖추고 누구나 원서만 내면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계산이 아닌가.
그런데도 해마다 거국적인 입시지옥이 되풀이되는 것은 아무 대학에나 진학하는 게 아니라 저마다 이른바 명문대학, 일류대학에 가겠다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명문이니 일류니 해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학에 들어가자면 한두 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원어민 교육이다, 족집게 과외다 해서 10여 년 넘게 적공(積功)을 해도 그중에서 선택된 학생만 명문대학의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다.
이런 교육풍토에서 개천에서 용이 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한낱 헛된 꿈일 뿐이다. 이제는 학력도 대물림이 되는 세상이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력이 자녀의 학력을 좌우하고 신분까지 상속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상류사회로 가는 등용문(登龍門)을 통과하려면 자식이 태어나면서부터 용의 재목으로 키우는 부모의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은 “공정한 사회는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를 주자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재력이나 학력이 ‘뒤처진 사람’에게는 그 기회가 오지 않는다. 우리의 교육은 이미 사회이동 통로의 기능을 잃고 신분상승을 재생산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제도로 전락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기야 ‘기회의 땅’이라던 미국도 요즘엔 사회적 지위와 부(富)가 상속되는 사실상의 신분사회로 옮아가고 있다지 않는가. 그래서 “지치고 가난한 사람들이여 내게로 오라”고 외치는 ‘자유의 여신상’이 오히려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광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