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꺼번에 여러 종류의 약을 섭취하는 ‘폴리파머시’가 노인들의 인지기능 저하를 유발할 수도 있다고 한다.
치매의 종류에는 알츠하이머형, 레비소체형, 뇌혈관성 등이 있다.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치매 ‘완치약’은 개발되지 않았다. 일단 발병하면 진행을 늦출 순 있어도, 원상태로 돌리는 치료법은 없다. 발병의 가장 큰 원인은 ‘노화’다. 오래 살면 살수록 뇌도 노화되므로 치매에 걸리기 쉬워진다. 또한 당뇨병·고혈압 같은 생활습관병이나 운동부족, 편식, 흡연, 더 나아가 고독감도 치매 발병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일본 치매 전문가 나가오 가즈히로 박사는 “이러한 요인 외에도 간과하고 있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다름 아니라 약물이 만들어내는 치매다. 나이가 들면 당뇨약과 혈압약을 비롯해 진통소염제, 위장약, 수면제 등 한꺼번에 여러 종류의 약을 섭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다약제 복용(폴리파머시)에 의해서도 인지기능이 저하되는 케이스가 상당수 발생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폴리파머시에 따른 인지기능 저하를 알츠하이머형 치매로 오진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나가오 박사는 “약을 줄이면 호전되는 것을 항치매제까지 복용해 급격히 병세를 악화시키거나 그대로 정말 치매 발병으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오사카 시에 거주하는 아키코 씨는 “80대 모친이 평소 7~8종류의 약을 복용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이상증세를 보였다. 어지럼증을 호소하는가 하면, 멍해 있는 시간이 늘었고, 허공에 손을 흔들며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일단 인근 병원에서 처방 받은 항치매제를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증상이 급격히 악화됐다.
고령자의 경우 간과 신장 기능이 성인보다 떨어져 약물 대사에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약물 부작용이 잦을 수밖에 없다. 거리의 노인들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일요신문DB
황급히 다른 병원을 찾아 치매 전문의와 상담했더니 “폴리파머시가 원인”이라는 말을 들었다. 너무 많은 약을 먹어 합병증이 온 것이다. 이후 항치매제를 끊고, 불필요한 약을 정리해 ‘꼭 먹어야 하는 약’ 2종류만 남겼다. 그러자 “섬망(환각, 망상, 일시적인 착란 상태)이 나타나지 않게 됐고, 치매와 같이 멍해지는 증상도 개선됐다”고 한다.
우리 몸에 들어오는 약은 간에서 대사해 신장을 통해 배출한다. 나가오 박사는 “고령자의 경우 간과 신장 기능이 성인보다 떨어질 뿐 아니라 약물 대사에도 시간이 걸린다”며 “약물 부작용이 잦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복용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인지기능 저하를 초래하는 약
단일 약제에 의해서도 인지기능이 저하되는 사례가 있다. 가장 발생 비율이 높은 것이 데파스, 할시온 등의 상품명으로 알려진 ‘벤조디아제핀 계열’의 항우울제와 수면제다. 불면을 호소하는 고령자들이 많아 10~20년째 수면유도제를 복용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들 약에 장기간 의존하게 되면 인지기능이 떨어지고 치매 발생률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부작용으로 섬망을 일으키거나 휘청거림, 넘어져 골절이 될 수도 있으니 고령자의 경우 특히 주의해야 한다.
다음으로 비율이 높은 것은 ‘H2 블로커(H2-Blockers) 계열의 위장약’이다. 이 역시 부작용으로 섬망이 나타나거나 공격성을 보이기도 한다. 덧붙여 “위궤양 치료제로 널리 쓰이는 PPI(프로톤펌프 억제제)도 인지기능 저하를 일으켜 치매 위험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약국에서 쉽게 구입 가능한 종합감기약도 주의가 필요하다. 종합감기약에는 초기 개발된 ‘1세대 항히스타민제’가 들어간 것이 많기 때문이다. 부작용으로 인지기능이 둔해지며, 의식이 흐려지거나 헛소리를 하는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또 졸음을 유발하므로 복용 후 운전은 피하는 게 좋다.
변비도 고령자들에게 흔하게 발생하는 질환이다. 다만 치료제로 쓰이는 산화마그네슘 복용에는 신중해야 한다. 고마그네슘혈증을 일으켜 인지기능을 떨어뜨릴 수 있어서다. 아울러 과민성 방광, 요실금 등의 치료제에 들어가는 항콜린제 또한 기억력과 사고력 등 인지기능을 저하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령자 시설을 운영 중인 일본의 주식회사 라이프 홈페이지.
#불필요한 약 줄였더니 나타난 효과
노인복지주택을 운영하고 있는 주식회사 라이프는 “입주자들의 처방 내용을 정밀히 점검해 불필요한 약을 줄였더니, 삶의 질(QOL)과 일상생활 수행능력(ADL)이 어느 정도 향상됐다”고 밝혔다.
라이프 측에 따르면 “2018년 3월부터 프로젝트팀을 만들어 치매증상 악화 예방을 목적으로 약을 줄여나가고 있다”고 한다. 외부 전문의, 약사 등의 협력 아래 벤조디아제핀 계열의 수면제, 삼환계 항우울제(TCA) 등은 사용하지 않거나 다른 약으로 대체했으며, 투여량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또 H2 블로커 위장약도 중지했다. 그 결과 “경도 인지장애(MCI)나 치매를 앓고 있는 입주자 중 약 16%가 공격성, 소리 지르기, 배회 같은 문제 행동이 개선됐다”고 한다.
나가오 박사는 “고령자가 최근 멍하니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든지, 반대로 완고해지고 화를 내는 경우가 늘었다면 복용하고 있는 약을 체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정말 꼭 필요한 약인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부득이하게 여러 약을 복용해야 할 때는 반드시 의사에게 상담을 받으라”고 덧붙였다.
항치매제, ‘완치’ 아닌 ‘완화’ 도우미 치매치료제라 불리는 ‘항치매제’는 크게 도네페질, 갈라타민, 리바스티그민, 메만틴 등 4종류가 있다. 항치매제로 승인받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치매 완화를 돕는 약물이지, 완치를 목적으로 나온 약품은 아니다. 가장 많이 처방되는 도네페질은 말을 걸어도 멍하고 반응이 둔한 사람이 제대로 반응하게 하며 활동적으로 만든다. 말하자면 자동차 가속페달과도 같은 약이다. 갈라타민, 리바스티그민도 그 계열이다. 반면 메만틴은 공격성을 억제하는 이른바 브레이크 역할을 겸한다. 이들 약의 효능은 개인차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반드시 환자의 상태를 지켜보면서 용량을 조절해야 한다. 또 치매 종류를 정확히 구분해 처방받아야 한다. 가령 다약제 복용에 의한 인지기능 저하로 치매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에게 도네페질을 투여하면 갑자기 폭언을 하거나 공격성이 강해지는 부작용을 경험할 수 있다. |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