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에 사의를 표명한 전국 법관은 1월 말 기준, 80명을 넘어섰다. 사진=일요신문DB
법관 정기인사를 앞두고 법원장과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비롯한 고위 법관들이 잇따라 사의를 표명하고 있다.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에 사의를 표명한 전국 법관은 1월 말 기준, 80명을 넘어섰다.
고위 법관들의 사의가 두드러진다. 전국 최대 규모 지방법원인 서울중앙지법 민중기 원장도 대법원에 사의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고, 서울고법 김필곤·김환수·이동근·이범균 부장판사 등도 사표를 낸 것으로 전해졌다. 모두 법원 내 ‘에이스’들로 분류된 법관들이다. 법원장과 고등법원 부장판사만 해도, 사의를 표명한 케이스가 20명에 달한다고 한다. 2020년에는 법원장과 고법 부장을 합해서 6명, 2019년엔 8명이 사표를 냈던 것과 비교할 때 2배 이상 급증했다.
법원 내 2심 사건을 전담하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고법 부장판사의 사의가 이처럼 급증한 것은 전관 사건 수임 제한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현행 변호사법에 따르면 판·검사 출신 변호사는 퇴직 전 1년 동안 근무한 기관의 사건은 퇴임 후 1년 동안 수임할 수 없으나,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개정안이 시행되면 고법 부장판사, 검사장 이상 전관 변호사들은 퇴직 전 3년 동안 근무한 기관의 사건을 퇴직 후 3년 동안 수임할 수 없게 된다. 과거 근무지를 중심으로 들어오는 사건 수임에 영향이 커지게 된 셈이다.
승진 개념이 없어짐과 동시에, 고법 부장판사에 대한 대우가 줄어든 점도 사의 표명에 영향을 줬다. 당장 대법원은 사법행정자문회의 결과를 토대로, 고법 부장판사에게 제공하던 전용차를 폐지하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고법 부장판사는 운전기사가 딸린 전용차를 제공받았지만, 2월 정기인사부터는 이 같은 지원이 사라진다.
동기 가운데 10% 정도만이 승진할 수 있었던, 성공의 상징과도 같았던 고법 부장판사 제도가 폐지되면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분위기다. 과거에는 고등 부장판사로 승진한 후 7~8년 지나면 관행적으로 법원장 자리에 오르곤 했다. 하지만 고등 부장판사 제도가 폐지되면서 법원장도 일선 판사들의 추천을 받아 뽑는 ‘법원장 추천제’가 확대 도입됐고, 이제는 전용차까지 폐지됐다.
올해 사표를 낸 한 고법 부장판사는 “매년 전관에 대한 예우를 줄이는 분위기가 있다 보니, 조금 빨리 결정을 한 것도 맞다”며 “그동안 법원 내에서 뜻을 찾았지만 분위기도 좋지 않고 고등 부장판사들이 과거와 달리 민폐처럼 받아들여지는 조직 분위기가 안타까워 올해 사표를 내기로 가족들과 얘기해 결정했다”고 털어놨다.
#변호사 시장도 어려운데…
변호사 시장 역시 코로나19로 얼어붙었지만, 판사들이 대거 사의를 밝힌 것에 대해서는 ‘법원 위상 추락’을 보여줄 수 있는 상징적인 모습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 재판 결과에 대해 판사 개인을 향한 직접적인 비난이나 신상털이도 유난히 많아 피로를 호소하는 판사들이 적지 않다. 특히 2020년에는 광복절 광화문 집회를 허용한 박형순 부장판사가 집중적인 비판을 받는 등 정치적인 사건 관련 판결에 관한 불만이 판사 개인을 향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최근에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정직 2개월 징계 집행정지 처분을 내린 홍순욱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가 방송인 김어준 씨로부터 “행정법원 일개 판사가 검찰총장 임기를 보장해 준, 있을 수 없는 판결”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판사들이 소신껏 내린 판단에 대해서도, 비판이 잇따르자 회의감이 커지고 있다. 한 판사는 “민간 시민단체들은 단체 성향에 따라 재판 결과를 비판하긴 했어도, 정치권에서는 가급적 존중을 해줬는데 이제는 정치권에서 먼저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이 나오면 판사의 신상을 공개하고, 판사 자리에서 잘라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며 “대부분의 법관은 양심과 법에 따라 성실하게 판단하는데 왜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안타깝다”고 호소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 역시 법원 내 적지 않은 파장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에 연루됐다가 이번에 옷을 벗는 한 판사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 당시 법원행정처까지 압수수색을 당했으나 금품수수 등 비리혐의가 포착된 법관은 아무도 없었지 않느냐”며 “그 후 조직 내에 위와 아래가 서로 소통과 교류가 이뤄지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가 이제 그만할 때가 된 것 같아 사의를 표명했다”고 설명했다.
3년 전 법원을 떠난 변호사는 “과거에는 사의를 표명하면 조직 안에서 ‘왜 나가느냐’고 잡았지만, 이제는 ‘잘 선택했다. 1년이라도 빨리 나가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라는 반응이 나온다”며 “그만큼 법원 조직에 대한 근무 매력도가 떨어지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실력 있는 고법 부장들을 비롯해 중추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판사들이 대거 조직을 떠나게 됐다는 점이다. 벌써부터 서초동 변호사 시장에서는 ‘재판이 늦어질 것’을 우려한다. 대법원 청사에서 열린 2018년 시무식 모습. 사진=임준선 기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문제는 실력 있는 고법 부장들을 비롯해 중추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판사들이 대거 조직을 떠나게 됐다는 점이다. 벌써부터 서초동 변호사 시장에서는 ‘재판이 늦어질 것’을 우려한다. 안 그래도 재판 속도가 더뎌지고 있는데, 실력 있는 판사들이 대거 법원을 떠나면 더 신뢰가 낮아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대형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는 “요새 판사들은 9시부터 6시까지만 일하려고 한다. 과거에 비해 정말 일을 안 한다”며 “복잡한 사건은 다 넘기고, 쉬운 사건만 하려고 해서 변호사들이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닌데 실력 있는 판사들이 대거 옷을 벗고 나가면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은 누가 나서서 맡겠느냐”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이제는 판사로 처음부터 뽑아 가르치는 게 아니라, 7년 이상 법조경력을 가진 사람을 법관으로 뽑아서 가르쳐야 하는데, 과거 도제식으로 길러낸 법관들에 비하면 일 처리 속도나 능률이 떨어지고 승진 개념도 사라져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 조직이라 가뜩이나 늘어난 미제 사건이 더 많아지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