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KBS 한국인의 밥상
김훈 작가와 함께하는 아주 특별한 동행. 전립투와 치자꽃젓갈 그리고 버선포까지 잠들어있던 옛 문헌 속 밥상이 생생히 부활한다.
김훈 작가와 한국인의 밥상의 동행으로 정조지를 만난다.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 등의 저자로 잘 알려진 김훈 작가. 그의 몇몇 작품을 읽다보면 그의 연필 끝에서 탄생하는 아름답고 명료한 단문처럼 그의 미각은 소박하면서도 세심하다는 걸 눈치 챌 수 있다.
그간 ‘한국인의 밥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숨기지 않던 김훈 작가가 10주년 특집 4편에 동행한다.
김훈 작가는 최근 18세기의 한 사내가 쓴 책을 관심 있게 읽고 있다 밝혔는데 그것은 조선 후기 실학자 풍석 서유구가 쓴 113권의 방대한 실용백과사전 ‘임원경제지’ 중 일곱 권의 ‘정조지’다.
솥 정(鼎)에 도마 조(俎). 즉 솥과 도마라는 일상적인 조리도구를 이름으로 내세운 것에서 알 수 있듯 ‘정조지’는 음식백과 사전이다.
이 책을 쓴 서유구는 조선의 경화세족 출신으로 요즘 식으로 말하면 ‘금수저 중의 금수저’에 해당하는 사대부였다. 그의 조부 서명응은 정조의 스승이었고 서유구 자신 또한 승정원, 규장각, 사헌부에서 일했고 형조, 예조, 호조, 병조 판서를 두루 거쳤으며 순창 군수와 수원 유수, 전라관찰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직접 농사를 짓고 강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생활인이기도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서유구는 23세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27세에 초계문신에 선발된 뒤로 76세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 그 사이 귀농했던 18년의 세월이 있었다. 그는 그 시기에 조선의 현실을 파악하고 절망했다.
그러면서 ‘오곡도 구분 못하는 자들이 양반이다’ ‘지금 선비들이 공부하는 것은 흙으로 만든 국이요 종이로 빚은 떡이다’ 등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 서유구가 “후대의 사람들이 따라 만들어먹을 수 있도록 이 책을 쓴다”며 백성들의 눈높이에서 저술한 것이 바로 ‘정조지’다.
한자로 저술됐다는 태생적 한계에 가로막혀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이 책은 약 17년 동안의 길고도 집요한 번역 과정을 거쳐 최근 완역됐다. 또한 책이 한 권 한 권 차례로 번역될 때마다 그 속의 음식들을 복원해온 요리 복원가들도 만날 수 있었다.
‘정조지’ 요리 복원가로 활동하는 곽미경, 곽유경 자매. 역사를 전공한 언니 미경 씨가 먼저 시작했고 그런 언니를 지켜보던 동생 유경 씨도 합류하게 됐다. 최불암 선생과 김훈 작가가 요리 복원가들의 연구소에 도착하자 복원가들은 쇠로 만든 모자를 들고 나타났다.
그것은 조선 시대 무관의 모자였던 전립을 솥처럼 이용하는 전립투. 우묵한 부분에 육수를 끓여 채소를 익혀 먹고 챙에는 고기를 구워먹는다는 이 요리는 조선 시대 민가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요리라고 한다.
또 요리복원가들은 전라관찰사 시절 노령산맥 인근에 시범농장을 만들어 고구마를 적극적으로 보급하는데 힘썼던 서유구의 흔적을 따라 한 고구마 농가를 찾았다. 전라북도 익산에서 6대 째 농사를 짓고 있다는 양귀용 씨 가족과 함께 정조지 속의 군고구마, 겨울을 견딘 움파로 만드는 파구이, 여행길에서도 콩가루를 이용해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즉석 두부인 ‘행주두부’를 맛본다.
그런가 하면 화성 궁평항에서 직접 공수해온 낙지로 해산물김치를 만들고 상추 뿌리와 해당화를 섞은 상추뿌리김치 그리고 무 속의 효소를 이용해 오직 물만으로 무염저(소금없는 무김치)를 완성한다.
특히 여름이나 돼야 피는 치자꽃을 구하기 위해 전국의 농원을 뒤진 요리 복원가들은 반쯤 핀 치자꽃 수십 송이를 구하는데 성공해 재밌고도 놀라운 음식을 만드는데 그것은 바로 치자꽃 젓갈. 가자미 젓갈을 담글 때와 비슷한 재료지만 주재료를 생선에서 꽃으로 바꿈으로써 이색적인 즐거움을 준다. 정조지 속 재밌는 음식들로 가득한 밥상을 만나본다.
한식 셰프인 신창호 씨는 2018년부터 2021년까지 4년 연속 미쉐린 1스타를 받았다. 그런 그가 요리 복원가들의 작업실을 찾았다. 얼마 전 ‘정조지’ 완역 소식을 접하고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는데 읽을수록 빠져들게 됐단다.
서유구를 설명하는데 있어 빠질 수 없는 식재료인 고구마에 자신만의 색깔을 입혀 고구마우유죽을 완성하고 고흥산 굴과 남양주의 협력 농장에서 찾은 대파로 정조지 속 움파구이를 재해석해 요리한다.
그동안 쌓아올린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좌우명 삼아 항상 공부하는 신창호 셰프를 위해 곽미경, 곽유경 요리 복원가는 정조지 속 놀라운 요리 하나를 또 하나 소개한다.
그것은 다진 고기에 소금 간을 한 뒤 버선으로 밟아 덩어리로 만든 뒤 발효시킨 다음 썰어 먹는 조편포였다. 이를 본 신창호 셰프는 서양의 초리조(chorizo), 소시송(saucisson), 살라미(salami)를 능가하는 육포라며 놀라워한다.
서유구는 ‘정조지’ 속에 다양한 일상용품을 활용하는 요리도 여럿 기록했다. 화로 위에 얹어 옷을 널어 말리는 도구였던 배롱을 이용한 육포인 배롱포와 항아리와 왕겻불을 이용한 메밀떡 혼돈병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최불암 선생과 김훈 작가를 가장 놀라게한 음식은 ‘가수저라’였다. 그것은 바로 ‘카스텔라’였는데 숙종이 노환으로 입맛을 잃자 북경에 다녀온 사신들이 가수저라(카스텔라)를 배워와 만들었다고.
가수저라(카스텔라)를 완성한 두 요리 복원가가 이번엔 키 큰 대나무를 가져오더니 마디를 잘라 그릇을 만들고 여기에 게살과 달걀에 양념을 섞어 담아 대나무 그릇째 삶으니 서유구 가문의 내림음식인 게구이가 됐다.
또한 서유구가 직접 잡은 민물 새우를 갈아 만들어 면이 붉은빛을 띈다는 홍사면은 모친께 드려 봉양했다고 전해진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