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7일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판문점 선언을 진행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공동사진취재단
앞서 검찰은 월성 원전 1호기 경제성 평가 조작 의혹 관련 문건을 삭제해 감사원 감사를 방해한 혐의로 산업부 공무원들을 기소한 바 있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2018년 5월 2일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에너지 분야 남북 경제협력 전문가 원자력’ 파일과, 같은 해 5월 14일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북한 지역 원전 건설 추진 방안’ 파일 등이 삭제 파일 복원 과정서 발견됐다. 그 외에도 ‘북한 전력 인프라 구축을 위한 단계적 협력 과제’, ‘북한 전력산업 현황 및 독일 통합사례’ 등 전력 시설과 관련한 파일들도 발견됐다.
이 파일들은 ‘60 pohjois(뽀요이스)’라는 폴더에 저장돼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뽀요이스는 핀란드어로 북쪽을 일컫는 단어다. 이 폴더엔 ‘북원추’라는 하위 폴더도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원추는 북한 원전 추진 방안 줄임말로 추정되고 있다.
2020년 10월 감사원의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타당성 관련 감사 보고서. 사진=연합뉴스
삭제된 북한 관련 파일들은 2018년 5월 초·중순에 생성된 것으로 전해졌다. 2018년 4월 27일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5월 26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됐다. 파일이 만들어진 시점은 1~2차 남북정상회담 사이에 껴 있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김정은과 도보다리 산책길에서 이뤄진 단독 회담 중 한반도 신경제 구상 관련 자료가 담긴 USB를 건넨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정황을 두고 야권에선 ‘2018년 1차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기 전 원전 건설 추진 등 경제협력 등 당근을 제시하며 김정은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인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국민의힘 한 관계자는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나 9월 ‘남북미 정상 판문점 회동’ 등 굵직한 외교 이벤트가 있었는데, 북한이 연쇄적 회담에 응한 이면에 이번에 발견된 북한 원전 추진 관련 문서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한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1월 29일 언론 배포 입장문을 냈다. 김 위원장은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라면서 “원전 게이트를 넘어 정권 운명을 흔들 수 있는 충격적인 이적행위”라고 했다. 청와대는 김 위원장 입장문을 즉각 반박했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북풍 공작과 다를 바 없는 무책임한 발언이며 묵과할 수 없다”면서 “김 위원장이 발언에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강 대변인은 “정부는 법적 조치를 포함해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강수를 던졌다. 청와대가 제1야당 대표를 향해 법적 조치를 예고한 것은 이례적이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사진=박은숙 기자
그러자 야권 인사들이 일제히 여권을 향해 공세를 펴며 김 위원장 지원 사격에 나섰다. 그간 김 위원장과 대립각을 세워 왔던 홍준표 무소속 의원은 1월 29일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김종인 위원장의 원전 관련 문재인 정부 이적행위 발언은 토씨 하나 틀린 말이 없다”고 했다. 홍 의원은 “청와대가 법적 조치를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경악할 만하다”면서 “더구나 북풍으로 4년 동안 국민을 속인 정권이 거꾸로 북풍을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라고 했다. 홍 의원은 “(문재인 정부가) 정권 말기가 되다보니 악만 남은 것 같다”고 쏘아붙였다.
서울시장 재보선에 출사표를 던진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1월 30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우리(한국)는 원전 중단, 북한에는 원전 건설. 사실이라면 누가 봐도 모순이고 기가 막히다”면서 “진실을 국민 앞에 낱낱이 밝혀야 한다”고 글을 남겼다. 안 대표는 “야당의 정당한 문제제기에 법적 조치를 운운하는 건 졸렬하다”면서 “북한이 원전 건설을 직접 요청한 것인지 여부와 북한 원전 건설 추진의 사실 여부 등 구체적인 내용을 국민 앞에 소상히 밝혀야 할 것”이라고 했다.
차기 대선 후보군인 유승민 전 의원은 1월 30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드러난 증거만 보더라도 우리 정부가 북한에 원전 건설을 추진하려 했다는 건 초등학생도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서 “청와대와 민주당이 파일 내용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야당 비판 말꼬리를 잡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건 도둑이 제 발 저린 격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유 의원은 “장관(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이 ‘죽을래’라고 협박하는데 대통령이나 장관 지시도 없이 어느 간 큰 산업부 공무원이 북한에 원전을 건설하는 문서를 작성했단 말인가”라고 꼬집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적극 방어에 나섰다. 윤준병 민주당 의원은 1월 30일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이 삭제한 530개 파일 중 220개는 박근혜 정부의 자료”라고 밝혔다. 윤 의원은 “박근혜 정부는 통일대박론까지 주장하지 않았나”라며 “산자부 공무원의 자료 삭제행위는 잘못된 것이지만 실체가 악의적인 범죄행위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이적 행위’ 발언에 대해 “내 눈을 의심했다”면서 “너무 턱없는 억측”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1월 30일 소셜미디어에 “당시 청와대에서 실무를 맡았던 윤건영 의원과 관련되는 산업부와 통일부도 모두 부인하고 항의했다”면서 “(이적 행위라고)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이 대표는 “설마 보궐선거 때문에 그토록 어긋나는 발언을 한 것이냐”면서 “공무원 컴퓨터 폴더에 무엇이 있었다면 그것이 당연히 남북정상회담에서 추진됐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국가 운영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고 덧붙였다.
2020년 6월 16일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된 지 30분 만에 정부는 북한 평화변전소에 보내던 전력 공급을 중단했다. 사진=연합뉴스
정치권에서 북한 원전 건설 추진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가운데, 북한의 전력 공급 사정도 재조명되고 있다. 북한은 꾸준한 전력난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 소식통은 “국제적인 경제 제재가 극심한 최근 들어 북한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발전 시설”이라면서 “한국 정부가 북한에 원전 건설을 추진하는 건 분명히 북한의 구미를 당길 만한 카드”라고 했다.
이 소식통은 “북한이 2020년 6월 개성공단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을 당시에도 한국 측으로부터 받는 전력 공급 라인은 그대로 뒀었다”면서 “연락사무소는 폭파하되 전기는 받겠다는 취지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연락사무소 폭파로 대외적인 자존심은 세우되 실익을 챙기는 또 다른 시각의 화전양면 전술이었던 셈”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개성공단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 ‘한국산 전기’가 공급된 것도 2018년 일이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는 제1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판문점 선언 일환으로 9월 14일 개소했다. 연락사무소 개소에 앞서 정부는 시범 가동을 통해 개성공단 내 평화변전소에 전력 공급을 시작했다. 연락사무소 운영에 필요한 전력을 한국 정부가 공급하겠다는 명분 아래 이뤄진 조치였다.
평화변전소는 10만kw급 변전소다. 2016년 개성공단이 폐쇄되기 전까지 한국전력은 평화변전소에 3만~4만kw의 전기를 보냈다. 2020년 6월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2018년 전기 공급을 재개한 뒤 한국 정부가 북한에 보낸 전력 양은 연락사무소 운영을 하고도 남을 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면서 “전력 공급을 하는 것 자체가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과 배치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도 부담스런 측면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뒤 30분 만에 정부는 평화변전소 전력 공급을 중단했다(관련기사 암암리에 보내다 폭파 직후 ‘뚝’…대북 전기 공급 차단 조치 내막).
이 소식통은 1월 30일 “2018년 4~5월부터 남북 평화무드가 부상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측의 대북 전력 공급이 재개됐다”면서 “1·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전력 공급과 관련한 협의가 어느 정도 이뤄지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었던 조치”라고 했다. 그는 “2018년 4월부터 모락모락 피어나던 ‘남북전기협력’은 평화변전소 전력 공급 이후 급물살을 타다가 지난해 남북관계 경색과 더불어 점점 힘을 잃었다”면서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이후엔 사실상 없던 일이 돼버린 모양새”라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