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미국 골든글로브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이 한 말이다. 여기서 ‘1인치의 장벽’이란 자막을 의미한다. 언어의 다름을 이해하고 그 내용을 알게 되면 다른 문화권의 훨씬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기생충’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기회가 열린다는 것이 한류 시장 곳곳에서 증명되고 있다.
윤여정은 평소 각종 기자회견에서 유쾌한 농담으로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기로 유명하다. 이런 그의 성향이 출중한 영어 실력을 만나 선댄스 영화제에서도 화제가 됐다. 지난해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제작보고회 당시 모습. 사진=박정훈 기자
#‘윤선생 영어교실’ 연 윤여정과 일어에 능통한 심은경
영화 ‘미나리’로 미국 유수의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 20관왕에 오르며 오는 4월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 수상이 기대되는 윤여정. 그를 향해 네티즌은 ‘윤선생 영어교실’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그의 유창한 영어 소통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정작 ‘미나리’에서 그는 영어를 잘 못하는 한국 할머니가 미국으로 건너와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연기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요즘 그의 영어 실력이 주목받고 있다.
윤여정이 ‘미나리’로 화제를 모으며 그가 선댄스 영화제에서 나눈 인터뷰가 뒤늦게 반향을 불어 일으켰다. 그는 ‘미나리’를 연출한 정이삭 감독이 “한국의 전설적인 배우”라고 소개하자 “‘전설’은 늙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잖아”라고 농담을 건넸고 “솔직히 이 영화는 하기 싫었다. ‘독립영화’니까. 그 얘기는 모두가 다 힘들게 영화를 만들어 한다는 의미”라고 너스레를 떨어 좌중을 웃게 만들었다. 이 영상은 각종 영어 유튜브 채널에서 공유되고 있으며 2∼3주 만에 조회수가 편당 60만∼70만 회에 육박할 정도다.
이 외에도 윤여정은 케이블채널 tvN 예능 ‘윤스테이’에서도 한옥 민박을 치며 외국인 숙박객들과 능숙하게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물론 그의 영어 발음이나 문법이 완벽하거나 훌륭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윤여정의 ‘한국식 말투 영어’가 잘 들린다”고 말한다. 영어 실력만 놓고 보자면 해외에서 성장하고 유학 생활을 한 배우 이서진, 최우식이 더 뛰어나다. 하지만 정작 손님과 시청자들을 웃게 만드는 주인공은 윤여정이다. 결국 쉬운 단어와 문법으로 자신 있게 영어를 구사하며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그의 모습이 더 인상적인 셈이다.
2020년 열린 제43회 일본 아카데미에서 일본 영화 ‘신문기자’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심은경은 오는 3월 19일 열리는 제44회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의 MC를 맡는다. 물론 진행은 일본어로 한다. 사진=일본 아카데미 시상식 트위터 캡처
심은경은 영화 ‘써니’와 ‘수상한 그녀’로 각각 8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은 흥행 배우다. 하지만 그는 당시 자신의 위상에 안주하지 않고 일본행을 택했다. 그곳에서 유학 생활부터 시작하며 일본어를 익힌 심은경은 2020년 열린 제43회 일본 아카데미에서 일본 영화 ‘신문기자’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유창한 일본어 솜씨로 무장한 그는 더 이상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 배우’가 아니다. 일본어로도 일본 배우들도 동등하게 대화를 나누고 연기력을 견줘 수상의 기쁨을 일궜다.
심은경은 “지난해 정말 귀중한 상을 받았고, 올해는 사회자로 시상식에 참석한다”며 “생애 처음으로 진행을 맡게 됐는데 제대로 말을 전할 수 있도록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소감을 전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단순한 의사소통을 넘어 일본어의 뉘앙스와 정서까지 정확히 꿰고 있다. 한 영화 관계자는 “대사를 외우기만 한다고 연기를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지의 정서와 감정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연기가 완성되는 데 심은경은 이를 해냈다”며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의 사회자를 맡겼다는 것은 그가 가진 상징성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했다.
#언어 소통, 현지화의 시작
홍콩의 성룡표 액션 영화가 국내 극장 흥행을 좌지우지하던 1990년대, 성룡은 수시로 내한했다. 각종 연예 정보프로그램을 비롯해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한 그는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뽐냈다. 한국 관객들은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며 더욱 친근감을 느꼈다.
역시 한국을 자주 찾는 할리우드 배우 톰 크루즈는 ‘톰 아저씨’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국내 관객들에게 익숙하고,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모습도 낯설지 않다. 대중은 언론을 통해 “김치와 불고기 먹어봤냐” “동대문 시장에 가 봤냐”는 뻔한 질문을 던지지 말라고 하면서도, 정작 그들이 “김치를 좋아한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 환호한다. 현지 팬들의 이목을 사로잡기 위한 확실한 팬서비스다.
이는 한류 시장의 확대와 함께 해외 시장을 공략하는 한류 스타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2012년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가 유튜브에서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며 의도와 상관없이 강제로(?) 미국 팝시장에 진출하게 된 싸이는 현지 유명 토크쇼와 예능 프로그램에 스스럼없이 출연해 농담을 주고받으며 인지도와 인기를 쌓았다.
이는 현재 전 세계 팝시장에서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K-팝 그룹인 BTS(방탄소년단)와 블랙핑크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BTS의 리더인 RM(김남준)은 탄탄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어떤 토크쇼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피력한다. 그들이 UN(국제연합)에서 공식 연설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영어 실력에 기반한다. 블랙핑크 멤버들 대다수도 영어가 한국어만큼 편하다. 오히려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더 편한 멤버들도 있다. 이처럼 영어라는 공동의 언어로 소통하는 사이 현지 팬들이 느끼는 이질감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또 다른 가요계 관계자는 “만약 싸이, BTS, 블랙핑크가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통역사와 함께 그들을 섭외할 수도 있지만 소통의 한계에 봉착하고 그들을 바라보는 현지 팬들이 느끼는 매력도 반감될 수밖에 없다”며 “결국 봉준호 감독이 이야기한 것처럼 언어의 장막을 넘음으로써 보다 친근하게 어우러질 수 있던 것이다”고 분석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