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AI를 빼놓고서는 바둑을 논할 수 없게 됐다. 국가대표 연구실에서 신진서 9단이 목진석 감독, 동료 기사들과 함께 연구하는 모습. 바둑판이 사라지고 모니터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잠시 인공지능 바둑의 흐름을 짚고 넘어가보자. 2016년 3월 이세돌과 대결을 벌였던 알파고를 구글은 편의상 ‘알파고 LEE’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1년 뒤 알파고는 새로운 버전으로 중국 일인자 커제와 대결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알파고 Master’다. 이 ‘알파고 Master’는 ‘알파고 LEE’보다 비약적인 실력 향상을 보이는데 당시 최강이라는 커제를 3-0으로 완파한 것은 물론, 중국의 세계대회 우승자 5인이 팀을 이룬 대국에서도 쉽게 승리를 거뒀다.
한국과 중국의 최고수에게 거푸 승리를 거둔 구글은 다시 1년 후 마지막 버전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것이 구글의 마지막 버전인 ‘알파고 Zero’다. 그런데 이 알파고 제로는 앞선 LEE와 Master에 비해 다른 특징을 갖는데 알파고 LEE와 알파고 Master가 인간의 기보를 바탕으로 연구개발 됐다면 알파고 Zero는 인간의 기보 없이 스스로 자가 학습하는 셀프트레이닝으로 탄생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버전의 수준은 어떨까. 구글의 발표를 들어보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먼저 구글에서 알파고 LEE와 알파고 Master를 붙여봤는데 100전 전승, 일방적으로 알파고 Master가 이겼다. 그리고 다시 알파고 Master와 마지막에 개발된 알파고 Zero를 대결시킨 결과 알파고 Zero가 89승 11패, 역시 압도적인 승리를 기록했다 한다.
아쉬운 것은 알파고 Zero는 인간과 대결한 적이 없어 정확한 치수를 가늠하긴 어렵다. 구글이 인공지능 바둑에서 손을 뗀 이후 페이스북에서 구글의 마지막 버전인 알파고 Zero를 기반으로 ‘엘프고’라는 새로운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을 선보이면서 인공지능 바둑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비록 구글은 떠났지만 엘프고 이후에도 중국의 절예, 골락시, 그리고 한국의 한돌, 바둑이, 돌바람과 유럽에서 개발된 릴라제로, 카타고 등이 잇달아 등장하면서 다양한 바둑 인공지능을 경험할 수 있는 게 요즘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열거한 인공지능의 우열을 굳이 비교한다면 ‘알파고LEE<엘프고<릴라제로<알파고Master<절예<알파고Zero’ 정도로 나타낼 수 있겠다.
포석이 약점이었던 최정은 인공지능으로 이를 극복하면서 여자 기사로는 처음으로 세계대회 정상을 노릴 수 있게 됐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커제에게 완벽한 승리를 거둔 알파고Master의 실력에 바둑계는 전율했었다. 그 막강함에 프로 최강군이 석 점은 기본이고 해마다 한 점씩 차이가 벌어지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고 최근엔 두 점에서 석 점이면 해볼 만하다는 게 바둑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프로기사들이 본격적으로 인공지능 연구에 나서면서 기량이 늘었고 인공지능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지면서 차이는 줄어들었다.
고레이팅(Go Rating)이란 것이 있다. 고레이팅은 세계 바둑랭킹을 매일 업데이트하는 전문 웹사이트다. 프랑스인 인공지능 학자 겸 사업가 레미 쿨롬 박사(46)가 운영하는 개인 매체지만 엘로(Elo) 기법을 근간으로 한 객관적 계산법으로 운영해 국제 바둑계의 의존도가 매우 높다.
그런데 현 세계랭킹 1위라 평가받는 신진서의 고레이팅 점수가 지난 연말 3800점을 찍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신진서 개인은 물론이고, 1980년 이후 어떤 기사도 밟아보지 못한 최고 점수다. 2위 커제(3714점)와의 격차는 무려 86점에 달한다.
그렇다면 신진서가 AI들 틈에 끼어든다면 어디쯤에 서게 될까. 2016년 이세돌과 세기의 대결을 펼쳤던 ‘알파고 LEE’가 3739점이었다. 하지만 알파고 Master(4858점), 규칙만 배운 후 자가 학습으로 알파고 Master를 넘어선 알파고 Zero(5185점)와의 격차는 아직도 까마득하다. 알파고 ‘은퇴’ 이후 등장한 줴이, 골락시, 카타고, 바두기 등 특급 AI들도 5000점이 넘는 것으로 추측된다.
관심은 신진서의 4000점 돌파 여부다. 신진서의 상승 속도를 볼 때 불가능한 수치는 아니지만 4000점 고지는 2위 커제에게 80% 이상의 승률을 보여야 가능하다고 한다. 쉽지 않은 수치이기도 하다.
알파고 등장 이후 바둑이 쇠락의 길을 걸을 것이라 내다본 사람들이 많았다. 기계에도 안 되는 바둑을 누가 보겠느냐는 것. 하지만 인공지능을 만들어낸 것도 인간이고, 그들은 인공지능 속에서 다른 길을 찾아냈다. 기존의 ‘정석’이 없어지고 ‘기세’란 단어가 사라졌다.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수를 저마다 독자적으로 연구하면서 자신의 기량과 기풍, 특성에 맞는 수법을 다각화함으로써 바둑은 더 다양해지고 재미있어졌다.
요즘 주가를 높이고 있는 이창석 6단은 인공지능으로 자신감을 얻은 케이스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인공지능으로부터 확인받았고 이후 기량이 급성장했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인공지능 등장 이후 가장 혜택을 본 기사를 꼽으라고 한다면 아이러니하게도 랭킹 1위 신진서 9단을 먼저 거론해야 한다. 신진서는 인공지능의 다음 한 수 그러니까 ‘블루스팟’이라는 착점을 찾아내는 확률이 판당 80%를 상회하고 90%에 이른다. 당연히 톱 수준.
그렇다고 천부적이라는 그의 감각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동료 기사들은 신진서가 인공지능을 활용해 해보지 않은 연구가 없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공부량이 그만큼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실제 본인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자기 전 죄책감이 든다”고 할 정도로 인공지능을 이용한 연구에 몰입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기량이 가장 발전한 기사로는 최정 9단을 꼽을 수 있겠다. 최정은 여자 기사로는 유일하게 현재 세계대회 우승자들과 겨뤄도 호각이라 평가받는데 평소 인공지능을 활용한 공부량이 어마어마하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포석에서 약점이 있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인공지능으로 극복하면서 세계대회 정상도 노려볼 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공부량이 많다 못해 지나쳐서 한국기원 화장실 앞에서 실신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최근 무명에서 급부상한 이창석 6단은 동료들 사이에서 ‘바둑의 신’이라고 불린다. 인공지능 수법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이 6단은 한 인터뷰에서 “연습대국보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연구에 시간을 더 들이고 있다. 과거 내 포석이 남들과 달라 고민이 많았는데 인공지능에게 물어보니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로부터 자신감을 얻었고 성적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말한 바 있다.
인공지능이 바둑계 깊숙이 들어온 것은 현실이다. 그렇지만 처음의 걱정과는 달리 참고도는 더욱 풍성해지고 기사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독특한 연구로 새로운 수법과 길을 찾아내고 있다. AI 5년, 바둑은 새로운 해답을 얻고 있는 중이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