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한강 토막살인’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장대호가 남긴 108페이지 글 가운데 일부다. 2019년 8월 서울 구로구 한 모텔 종업원으로 일하던 장대호는 지난해 8월 한 투숙객이 반말을 하는 등 시비를 걸고 숙박비를 주지 않았다며 둔기로 살해했다. 장대호는 사체를 흉기로 훼손해 한강에 버렸다.
일요신문은 장대호가 회고록으로 쓴 108페이지 분량의 글을 단독 입수했다. 수필과 시 등 다양한 형태로 기록된 장대호의 글을 전달한 A 씨는 “장대호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이 공개되기를 바라고 몇 명에게 보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사진=연합뉴스
장대호의 108페이지 회고록 중 일부. 사진=A 씨 제공
장대호는 이런 장문의 회고록을 쓴 이유에 대해 “이 내용은 출판 목적으로 작성됐다가 계약 불발로 무료 배포하게 됐다. 널리 배포해 달라. 이 원고를 마지막으로 앞으로는 어떤 집필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후 나오는 나와 관련된 글들은 나와 아무 상관없음을 알린다”고 적어뒀다.
장대호의 글은 시처럼 적은 글 몇 개와 사회적 주장을 적어둔 글과 30페이지 분량의 ‘지옥행 급행열차’로 이뤄져 있다.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지옥행 급행열차는 범행 직후부터 재판이 끝날 때까지를 정리한 내용이다. 지옥행 급행열차는 한강에서 시신이 발견됐을 때부터 시작된다.
2019년 8월 16일 장대호는 자수하기 위해 서울지방경찰청을 찾았다. 하지만 서울청 안내실 직원은 자수한다는 그를 유치장 공짜 밥을 먹기 위해 찾아온 사람 정도로 착각했던 것 같다. 직원은 장대호에게 ‘자수는 여기서 안 되고 종로경찰서로 가라’는 말을 듣게 된다. 종로서를 찾은 장대호는 자수하러 왔다고 말했지만 강력계 형사도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시큰둥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장대호는 경찰이 자신을 새벽에 가끔 찾아오는 노숙자로 대하는 느낌에 “나 지금 간다? 지금 나 놓치면 당신 큰일 나는 거야”라고 했다. 이에 경찰이 ‘잠시만요’라고 멈춰 세웠고 죽은 사람 이름을 정확히 대자 그제야 눈빛이 변하고 살인범으로 생각해 수갑을 채웠다고 한다. 그는 이런 내용을 꼼꼼하게 적어뒀다.
장대호는 언론에 대한 불만도 자주 언급했다. ‘반성하지 않은 장대호’, ‘조끼에서 USB 몰래카메라 발견’ 등의 헤드라인으로 일방적으로 물어 뜯겼다고 했다. 장대호는 원심 선고 때 아는 사람이 오기로 해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는데 ‘오열 유족 노려보며 한숨 쉰 장대호’라고 보도됐다며 답답해했다. 또한 바른 자세로 법원에 입장했더니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가는 장대호’라고 보도됐다고 했다. 장대호는 “어떻게 해도 반성의 빛이 없다며 공격을 가하는 일부 언론 보도”이라며 “바깥세상에서는 나의 눈 맞춤을 곱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 움츠러들었다”고 말했다.
장대호의 회고록은 시처럼 적은 글 몇 개와 사회적 주장을 적어둔 글, 30페이지 분량의 ‘지옥행 급행열차’로 이뤄져 있다.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지옥행 급행열차’는 범행 직후부터 재판이 끝날 때까지를 정리한 내용이다. 사진=A 씨 제공
장대호는 “내가 떠난 뒤 성매매 남성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 방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나를 유혹해 놓고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고소하는 것을 경계했고 나를 지킬 게 필요했다. 소형카메라를 구입해 작업 조끼 안쪽에 설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후 그 카메라를 쓸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고 조사 결과 몰래카메라로 의심되는 영상도 나오지 않았는데 언론의 비판을 받았고 소형 카메라는 압수당했다고 억울해 했다.
2019년 10월 재판을 받던 장대호는 자신의 주장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해 사건 기록 노트를 작성했다. 11월 19일 MBC는 이 노트를 입수해 “장대호 ‘범행 일지’ 단독 입수…범행 도구 모텔에”라고 보도했다. 그런데 이 보도가 나오기 전인 11월 8일 장대호를 접견 온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장대호는 “호기심에 나가봤는데 MBC 기자였고, 기자가 ‘여전히 사형을 원하냐’고 물었을 때 그의 정체와 의도를 몰라 방어적으로 ‘네’라고 대답했다”고 설명했다. MBC는 이를 ‘사형 받으려 항소했다’며 ‘비뚤어진 영웅 심리’라고 보도했다.
지난해 3월 공개돼 논란이 됐던 회고록을 작성하게 된 배경도 적었다. 장대호는 2심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선 변호인으로 교체됐고 사건 당시 상황을 기록해서 전달할 생각으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자신이 작성한 글을 필사해 변호인뿐만 아니라 언론사에 배포할 계획을 세우게 됐다.
장대호는 “나의 극악한 이미지를 희석시킬 수 있는 입장 전문이었고, 항소심 선고 전 엄벌 여론이 크게 일어나지 않을 것도 계산했다”고 적었다. 그는 이 글을 밖으로 보내기 위해 다음날 집행유예로 나가는 수용자에게 건넨다. 그런데 발각이 돼 장대호는 22일 동안 TV 시청 금지, 신문 구독 금지 등의 징벌을 받았다고 했다.
지난해 2월 2심 두 번째 공판에서 장대호는 “원고 측 유족이 내 엄벌을 요구했다. 유족이 발언할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막상 실제로 유족을 보니 그냥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남겨진 유족의 처지가 내 어린 시절 기억들에 사무치면서 한동안 슬픔에 나답지 않은 눈물을 보였다”고 적었다. 그는 이후에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적었다.
2019년 10월 재판을 받던 장대호는 자신의 주장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해 사건 기록 노트를 작성한다. 11월 19일 MBC는 이 노트를 입수해 장대호 “‘범행 일지’ 단독 입수…범행 도구 모텔에”라고 보도했다. 회고록에는 당시 교도소로 접견 온 기자와의 만남 과정도 서술돼 있다. 사진=A 씨가 제공한 회고록의 일부
그는 “입금자 명도 내가 아닌 모친 명의로 해 ‘장대호는 돈이 없는데 그 모친이 아들을 위해 무리하게 마련한 금액’이라는 인상을 줘 동정심을 자극하려는 계산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어머니는 “예전에 네가 세월호 학생들이 안타깝다며 조문도 다녀왔다 그랬는데 너 왜 세월호 슬프지 않다고 해 욕을 먹니.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돈 아무리 써봐야 소용없을 거 같다. 돈 안 보낸다. 거기서 몸 건강히 잘 있어라”라는 서신을 장대호에게 보냈다. 장대호는 과거 “눈물 날 정도의 분노와 슬픔은 아니더라도 나보다 먼저 앞서 간 어린 영혼들을 위로하고 싶었다”며 과거 합동 분향소에 참석했던 날을 적어두기도 했다.
그는 2심 최후 발언에서 ‘나는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 성격이다. 반사회적 성격이상자라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사회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감수성과 눈물을 강요하는지 모르겠다”면서 “가짜 눈물쇼보다는 유족들에게 실질적인 피해 보상을 위해 노력하겠다. 유족들은 아무 상관이 없는 분들인데 내 행동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보게 됐다. 다 내가 잘못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전체 맥락을 편집해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 장대호는 엄벌에 처해야’라고 보도했다며 원망했다.
다만 장대호는 “언론사는 제 할일을 충실히 했고 검사 또한 최선을 다해 나를 엄벌 구형했다. 내 변호사도 최선을 다해 변호해줬다. 나도 최선을 다해 재판에 임했다. 여기에는 감상이나 도덕이 없다. 그저 자신을 위해 최선의 수를 둔 한 인간의 생존 본능이 있을 뿐”이라고 평했다. 장대호는 무기징역이 확정된 것을 두고 “이제 남은 것은 나의 죄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나도 그렇게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고 의미 없는 하루를 내달리고 있다”며 후회를 내비치기도 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