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9단인 조훈현(왼쪽)과 특별승단으로 9단에 오른 이창호. 사진=월간바둑 제공
국내 최초 9단은 조훈현이다. 한국 바둑계를 호령하며 전관왕 신화를 만든 바둑황제도 9단이 되는데 20년이 걸렸다. 조훈현은 1962년 10월에 입단해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72년 9월 일본기원에서 다시 5단을 특별 인정받았고 나중에 한국기원 소속기사로 돌아왔다. 1982년 6월에 9단에 올랐다. 1983년 ‘영원한 국수’ 김인이 두 번째 9단으로 등록했고, 한국 바둑의 개척자 고 조남철 선생도 특별 추천으로 입신반열에 세 번째로 올랐다.
새천년이 되기 전까진 승단대회가 따로 있었다. 승단대회를 건너뛴 특별 승단자 1호와 2호는 이창호와 유창혁이다. 세계대회 성적을 감안해 1996년 6월 17일에 7단에서 9단으로 점프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이창호 9단은 “제 성격상 한걸음씩 순리대로 승단하는 게 더 마음에 들었다”라고 했고, 입단 12년 만에 9단에 오른 유창혁은 “1년에 10판씩 의무적으로 둬야 하는 승단대국을 벗어나 마음이 편하다. 대국료 없는 승단대회는 큰 의미가 없다”라고 제도개혁을 주장했다.
승단 대회에 무용론이 나왔다. 2000년 초 마침 이세돌이 3단 명찰을 달고 세계대회를 휩쓸자 한국기원도 제도 개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기원은 대회별 점수제와 세계대회 우승 시 점프승단 규정을 도입했다. 9단이 되기가 비교적 쉬워졌다.
1983년 조남철 입신축하연. 사진=월간바둑 제공
제도 변경의 혜택으로 최단기간 9단에 오른 이는 박영훈이다. 1999년 12월 입단해 2004년 7월 제17기 후지쓰배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곧바로 9단이 되었다. 4년 7개월 걸렸다. 현 한국랭킹 1위 신진서도 5년 9개월이 걸렸다. 18세에 9단이 되었고, 지금도 가장 나이 어린 9단이다. 승부와 멀어져 1승이 버거운 노장기사들은 몇십 년이 걸려 어렵게 훈장을 달기도 한다. 노영하가 32년, 홍종현이 34년, 양상국은 36년 걸렸다. 작년 입신에 오른 한철균은 대학교 3학년이었던 1976년 입단해 9단까지 43년이 걸렸다. 국내 최장기록이다.
중국은 1982년 단위제를 실시하면서 국가체육총국에서 오송생 9단, 녜웨이핑 9단, 천주더 9단 등 3명에게 9단증을 인허하면서 최초 9단이 됐다. 세계대회 우승과 9단을 직결하는 제도를 도입했던 중국도 천야오예, 판팅위 등이 10대 시절 입신에 올랐다.
일본 최초의 9단은 후지사와 호사이(藤澤朋齋) 9단이다. 1933년 입단하여 1949년에 9단 칭호를 받았다. 우칭위안(1950년), 하시모토 우타로(1954년), 사카다 에이오(1955년), 기타니 미노루(1956년)가 차례대로 9단이 되었다.
한국에서 9단이 되려면 8단이 되어서 승단점수 240점을 모아야 한다. 점수는 대회마다 다르다. 승리하면 1~4점을 받는다. 4점을 받는 종합기전을 기준으로 삼으면 8단에서 60승이 필요하다. 특별승단제도에 따르면 세계대회 우승은 바로 9단에 오르고, 세계대회 준우승과 국내대회 우승은 2단위 점프, 국내대회 준우승과 제한기전 우승은 1단위가 점프한다.
한국 여자 9단은 4명이다. 2008년 박지은, 2010년 조혜연, 2018년 최정이 9단이 되었다. 2019년에 김혜민이 마지막으로 입신에 올랐다. 이민진 8단과 권효진·오유진 7단 등이 그 뒤에서 ‘여자 5호’를 노리고 있다. 서두에 언급한 한상훈 9단은 한국기원에서 98번째 9단이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9단은 87명이고, 은퇴(제명)한 기사가 11명이 있다.
다음 차례 9단이 되는 기사는 99번째 9단이다. 누가 차지할까. 승단점수만 살피면 권갑용 8단, 박상돈 8단 등이 가장 근접해있고, 젊은 기사로는 윤찬희, 박승화 8단 등이 유력하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