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대사관 대사 대리의 망명 사실이 1월 알려졌다. 사진=CNN 온라인 인터뷰 화면 갈무리
1월 25일 전직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가 2019년 한국에 입국해 당국 보호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주인공은 류현우 전 대사대리였다. 참사관이었던 그는 2017년 9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결의 2371호에 의거해 서창식 전 대사가 추방되면서 대사대리 직을 맡은 것으로 파악됐다. 대사대리 직을 수행하던 2019년 9월 한국에 입국해 정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류 전 대사대리의 망명 소식이 알려진 뒤 그의 출신 성분을 두고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북한 김씨 일가 통치 자금 조달 및 관리를 맡은 ‘노동당 39호실’ 전일춘 전 실장 사위라는 설도 그중 하나였다. 정보당국은 류 전 대사대리 망명 여부와 출신 성분에 대해 “확인해 줄 수 없다”는 공식 입장을 전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김정은 금고지기’ 친인척이 한국으로 망명한 셈이 된다. 북한 지도부가 받는 충격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노동당 39호실은 북한 외화 획득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미 육군대학은 39호실에 대해 “마약 밀매, 화폐 위조, 담배 밀매 등 북한의 불법 활동을 지휘하는 기관”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2010년 북한 노동당 39호실 새로운 책임자로 얼굴을 드러냈던 전일춘(사진 왼쪽). 전일춘이 김정일 지시를 경청하는 장면. 최근 망명 사실이 알려진 류현우 전 북한 쿠웨이트 대사대리는 전일춘의 사위로 알려진 인물이다. 사진=연합뉴스
최근에도 39호실은 중국 현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후문이다. 39호실이 주도해 중국 현지서 인민폐(위안화) 위조가 성행하고 있다는 주의보가 내려지고 있다고 알려졌다.
중국 거주 북한 소식통은 “북한이 2020년 코로나19와 홍수 등 대형 악재에 연이어 시달리면서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 39호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소식통은 “장성택 처형 이후 예전처럼 북중관계가 가깝지 않은 상황”이라면서 “39호실이 자칫 레드라인을 넘을 경우 북중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급랭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39호실은 사실상 김씨 일가 ‘실탄 마련’을 담당하는 행동대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가 강화되면서 39호실 책임은 막중해졌다. 그 가운데 39호실에 대한 핵심 정보를 접근할 수 있는 인사가 망명했다면, 정보 당국 입장에선 상당히 활용도가 높은 셈이다. 류 전 대사대리가 전직 39호실장과 실질적으로 연결돼 있을 경우, 그에게 있는 정보 데이터베이스가 국제사회에 미칠 파장은 적지 않을 전망이다. 복수 대북 소식통이 ‘태영호-조성길 망명’보다 ‘류현우 케이스’에 집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미국 방송매체 CNN은 2월 1일 류 전 대사대리와의 인터뷰 내용을 공개했다. 류 전 대사대리는 인터뷰에서 북한 체제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들을 언급했다. 류 전 대사대리는 김정은과 북핵문제에 대해 “(김정은이) 핵무기는 생존 열쇠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비핵화는 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핵무기는 북한 체제 안전성과 직결돼 있다”고 했다.
2019년 7월 한국으로 망명한 조성길 전 이탈리아 주재 북한대사관 대사대리. 사진=연합뉴스
류 전 대사대리는 “북한이 미국과 핵무기 감축을 협상할 용의는 있겠지만 핵무기를 모두 포기할 것 같진 않다”면서 “중동에서 근무하는 동안 당시 부통령이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란핵 문제를 다루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바이든 대통령이 경험을 바탕으로 북핵문제도 현명하게 풀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고 했다.
CNN 인터뷰에 따르면 류 전 대사대리는 망명 한 달 전부터 탈출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망명 당일 딸에게 “자유를 찾아 엄마, 아빠와 함께 가자”며 망명 계획을 알렸으며, 일가족이 쿠웨이트 주재 한국 대사관으로 차를 몰고 가 망명을 신청했다. 그는 북한에 83세 노모와 형제자매 3명을 남겨뒀으며, 장인 장모 역시 평양에 살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망명한 탓에 다른 가족들이 처벌받는 걸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면서 “북한이 21세기에 봉건적인 연좌제 처벌을 행한다는 게 너무나도 끔찍하다”고 덧붙였다.
류 전 대사대리는 쿠웨이트 당국이 대북 제재에 따라 북한 노동자 대부분을 추방하던 2019년 망명했다. 국제적인 대북 압박과 제재가 이어지면서 쿠웨이트에서 발생한 노동자 추방 사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심적 압박감이 그를 망명길로 이끌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신분으로 망명한 뒤 한국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 사진=박은숙 기자
류 전 대사대리는 한국으로 망명한 뒤 특별한 직함을 달지 않고 대학원에 재학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통상적으로 북한 고위급 인사가 망명한 뒤엔 국정원 내부 혹은 산하 연구기관에 연구위원 직을 수행한다.
한 대북 소식통은 “류 전 대사대리가 정보기관이나 산하 연구소에서 일을 하지 않는 상황은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면서 “2019년 7월 입국한 조성길 전 주 이탈리아 북한대사관 대사대리는 정부산하 연구기관에서 활동 중인데, 두 달 뒤 망명한 류 전 대사대리는 정부와 관련한 어떤 일도 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소식통은 “조 전 대사대리를 기점으로 북한 고위층 망명자들에 대한 처우가 달라졌을 수 있다”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정부가 망명한 북한 고위층들의 활용법이 다소 소극적으로 변한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는 “류 전 대사대리의 경우 장인이 노동당 39호실 핵심 관계자였던 만큼, 지금까지 고위층 탈북민들과 달리 김정은 정권의 핵심 정보에 대한 이해가 훨씬 높을 수 있다”면서 “그런데도 정부가 이런 고급 정보원을 어떤 방식으로라도 활용하지 않는 것은 의아한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특권층으로 살아온 류 전 대사대리가 가족과 함께 한국 망명을 선택했다”면서 “김정은이 앞으로 외교관을 포함한 해외 파견 근무자들에 대한 감시를 더욱 강화하겠지만 자유를 갈구하는 북한 주민들의 한국행을 영영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태 의원은 “북한 주민 의식을 깨우는 자유로운 흐름을 영원히 폭력으로 멈춰 세울 수는 없다”면서 “이번 고위급 탈북자 망명은 당연한 역사적 진리를 웅변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