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경기지사가 1월 1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군사시설 보호구역 해제 및 완화 당정협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1998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엔 이른바 ‘9룡’이 있었다. 이회창 이인제 이수성 이홍구 김덕룡 최형우 이한동 김윤환 박찬종 후보였다. 9룡의 대권 레이스는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경선에서 이기는 자가 대선에서 야당 후보를 여유롭게 이길 것이란 전망이 유력했다. 야당에선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준비하고 있었지만 9룡의 ‘흥행몰이’에 빛이 가려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
이회창 후보는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다크호스로 떠올랐던 이인제 후보를 물리치고 본선에 진출했다. 하지만 이 후보는 김대중 후보에게 패했다. IMF 외환위기, 자녀 병역 논란, 호남과 충청의 DJP 연합, 이인제 후보의 탈당 및 독자 출마 등 수많은 악재가 겹치면서 이 회창 후보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이 후보와 김대중 후보 간 득표율 차이는 1.5%포인트 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9룡’ 간 레이스에서부터 시작된 ‘이회창 대세론’이 그만큼 공고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훌쩍 지난 정치권에 다시 ‘용들의 전쟁’ 가능성이 꿈틀거리고 있다. 진원지는 여권 내부다. 이재명 경기지사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외엔 의미 있는 지지율을 보이는 후보가 떠오르지 않자, 최대한 많은 잠룡들을 끌어들여 판을 키워보자는 취지에서 불거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사와 이 대표 외에 11명이 여기에 이름을 올리면서 ‘13룡’이란 명칭이 붙었다.
13룡은 주로 지역별로 분류된다. 호남에선 이낙연 대표와 정세균 국무총리, 임종석 전 비서실장이다. PK(부산·경남)에선 김경수 지사와 김두관 의원이, TK(대구·경북)에선 이재명 지사를 필두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김부겸 전 의원이 꼽혔다. 강원의 이광재 의원과 최문순 강원지사, 서울 박용진 의원도 이름을 올렸다. 충청의 양승조 충남지사와 이인영 통일부 장관까지 더하면 13룡은 완성된다.
이광재 의원이 2020년 12월 21일 국회 의원회관 의원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이낙연 대표와 이재명 지사는 일찌감치 차기 후보로 거론되며 ‘양강’을 형성하고 있다. 최근 모든 여론조사에선 이 지사가 이 대표를 제치고 1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세균 총리는 4월 재보궐 선거를 전후로 사퇴한 뒤 레이스에 뛰어들 전망이다. 박용진 의원은 지난해 12월 “각오가 섰다”면서 사실상 출마 선언을 했다. 원조 친노 이광재 의원은 1월 28일 대선 출마에 대해 “고민 중”이라면서 긍정적으로 답했다.
임종석 전 실장의 경우 그동안 ‘차출론’이 끊이지 않았다. 친문계 3후보론 움직임과 관련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사들 중 한 명이다. 추미애 전 장관은 퇴임 후 별다른 입장을 밝히진 않았지만 출마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일요신문이 여론조사기관 조원씨앤아이에 의뢰해 1월 31일부터 사흘간 실시한 차기 대선후보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추 전 장관은 3.6%로 여권 후보들 중 이재명·이낙연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관련기사 [1500호 여론조사] 대선주자 선호도 이재명 28.5% 윤석열 26.3% ‘박빙’, 자세한 사항은 조원씨앤아이 또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김두관 의원과 김부겸 전 의원, 이인영 장관 역시 그동안 자천타천 차기 후보로 여러 차례 오르내렸다. 현역 단체장인 양승조 최문순 지사도 눈길을 모은다. 무엇보다 김경수 지사가 포함된 게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친문 적자’ 김 지사는 당초 친문계가 내세우려 했던 후보로 알려져 있다. ‘드루킹 사건’으로 1, 2심 모두 유죄를 받으면서 사실상 차기 도전이 힘들어진 것 아니냐는 관측이 우세한 상황이지만 친문 일각에선 ‘대법원 판결이 남아있다’는 기류도 감지된다.
13룡 등판론에 대해 그동안 민주당 의원들은 ‘소설 같은 얘기’라는 반응이었다. 한 중진급 의원은 “누가 만들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재명 이낙연 정세균 외엔 출마 가능성이 있는 후보들, 이름이 알려진 정치인 등을 나열한 수준에 불과해 보인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대선을 앞두고 돌아다니는 이런 명단은 그 진위 여부보다는 왜 나오는 것인지를 살펴봐야 한다”면서 “한 친문계 핵심 인사가 최초로 13룡을 언급했다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낙연 대표가 2월 1일 더불어민주당 국회 당대표실에서 김경수 경남도지사를 접견하고 있다. 사진=이종현 기자
정치권에서도 13룡 등판론이 불거진 배경을 두고 분석이 한창인 모습이다. 앞서의 민주당 중진 의원은 “결국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낙연 대표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고, 이재명 지사의 경우 좀처럼 30%대로 올라서지 못하고 있다”면서 “야권에서 아직 제대로 된 후보조차 없는 상황인데도 이렇다. 출마 여부도 모르는 윤석열 총장을 상대로 이런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큰 문제”라고 했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이다.
“(13룡은) 판을 키우자는 것이다. 과거 신한국당이 ‘9룡’을 내세워 흥행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낙연 이재명의 경우 문재인 정부 출범 때부터 차기 주자로 거론됐다. 자칫 식상한 이미지가 될 수 있다. 또 뻔한 경선이 될 수도 있다. 자칫 보수 야권에서 새로운 후보가 나오면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최대한 판을 키워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 모아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등판하는 후보들의 머릿수부터 늘려야 한다.”
민주당 친문 재선 의원은 13룡 등판론에 대해 “차차기를 대비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치인들에게 ‘대선 출마 경험’은 큰 스펙이나 다름없다. 소수를 제외하곤 차기보다 차차기를 기대할 만한 후보들이 제법 있다. 경선 레이스를 바탕으로 두각을 나타내면 향후 민주당을 짊어질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13룡 등판은 실보단 득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이를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친문계의 제3후보 찾기 움직임과 맞물려 있을 가능성 때문이다. 즉, 판을 키우는 게 아니라 ‘판을 흔들기 위한’ 노림수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반 이재명 정서’가 깔려 있다. 최근 이 지사가 차기 대선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1위를 독주하자 13룡이 다시 확산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비문계로 분류되는 한 민주당 재선 의원은 “(13룡 등판론의) 핵심은 이 지사에게 순순히 넘겨줄 수 없다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반문하면서 “친문계로선 더 많은 선택지를 원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친문은 경선에서 제3후보가 아닌, 4후보 5후보까지 내세워 경쟁을 시키려고 할 것”이라면서 “이는 경선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 이면에 ‘적자 후보’가 없다는 고민이 함께 담겨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