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명기 황진이는 애절한 사랑의 감정을 3장 6구에 녹여낸 뛰어난 시조 작가였다. 사진은 지난해 운현궁에서 펼쳐진 한국전통문화연구원 최윤정 단원의 ‘황진이춤-동짓달 기나긴 밤’ 공연 모습. 뉴시스 |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어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황진이-
시조(時調)는 우리 민족 고유의 시 형식이다. 우리말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한번 들으면 금방 친숙해지고 또 자연스럽게 따라 흥얼거리게 된다. 그만큼 우리 민족의 생리에 맞는 형식의 시라는 이야기다. 현대시에서도 시조의 운율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옛날에는 선비들이 가슴에 무언가 와 닿으면 시조를 지었다.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시조를 지었고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기 위해 시조를 지었다. 사랑하는 님을 위한 시조도 있고 탐관오리를 풍자하는 시조도 없지 않았다.
시조는 원래 고려가요와 같은 장가(長歌)의 대립 개념으로서 단가(短歌)라 불렸으나 조선 영조 때 가객 이세춘(李世春)이 ‘시절가조(時節歌調)’라는 이름을 붙인 후부터 시조라 부르게 됐다.
시조의 발생에 대하여는 학설이 구구하다. 그러나 대체로 신라 향가(鄕歌)로 거슬러 올라가 그 싹을 마련했고, 고려 중엽 고려가요를 거치며 그 형식이 정제되었으며, 고려 말기 3장 6구의 시조로 정형화된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일대 융성기를 맞은 시조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등의 대가를 배출하며 우리 문학사의 절정기를 이룬다.
▲ 시조는 남녀노소나 신분계층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흥얼거릴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신윤복의 ‘주유청강’. |
바위 끝 물가에 슬카지 노니노라.
그남은 여남은 일이야 부럴 줄이 있으랴.
-윤선도-
이러한 시조의 융성은 세종대왕에 의해 창제된 한글이라는 우리 민족의 표기수단을 얻은 데 기인하는 바 크다. 결국 우리의 가락이 우리 문자와 합쳐져 우리 민족의 정서를 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시조는 다른 형식의 문학들처럼 전문 문인들에 의해 독점된 것은 아니었다. 남녀노소와 신분계층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짓고 흥얼거릴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특히 기생 출신의 황진이는 우리말의 맛과 멋을 제대로 살려 시조의 난숙기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유행한 사설시조는 그 소재가 워낙 다양해 일반 평민이나 노비들이 지은 것도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결국 이런 형식과 내용의 발전 파괴는 신체시를 거쳐 현대시로의 자연스런 연결 고리가 됐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각종 시조집에 실려 오늘날 전해지는 조선의 시조 편수는 2000여 수에 달하는 방대한 것이다. 이는 시조에 담긴 사상과 정서가 한국의 역사를 시간과 공간으로 그대로 꿰뚫어 모은 정신적 유산임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창 내고쟈 창을 내고쟈 이내 가슴에 창 내고쟈.
모장지 셰살장지 들장지 열장지 암돌져귀 수돌져귀 배목걸새 크나큰 쟝도리로 뚱닥 바가 이내 가슴에 창 내고쟈.
잇다감 하 답답할제면 여다져 볼가 하노라.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