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탓에 프로야구 10구단이 모두 국내에 스프링캠프를 차렸다. 사진=연합뉴스
김태형 두산 베어스 감독은 “내가 프로 선수 2년 차일 때 걸프 전쟁(1991년)이 터져 몇몇 팀이 해외 캠프를 못 간 걸로 기억한다. 그 이후로 이런 광경은 나도 처음 본다”고 기억하기도 했다.
지난해 프로야구는 정규시즌을 5월 5일 개막했다. 당초 계획보다 한 달 넘게 늦어졌다. 개막 예정일을 앞두고 코로나19가 급속도로 퍼진 탓이다. 올해는 일단 예년과 비슷한 4월 3일 개막한다. 2월 스프링캠프와 3월 시범경기를 무탈하게 소화해야 정상적으로 시즌을 시작할 수 있다. 예년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2021시즌을 무사히 완주하기 위한 10개 구단의 사투가 막을 올렸다.
#코로나19와의 전쟁은 캠프부터
각 구단은 ‘코로나19와의 전쟁’을 스프링 캠프의 중요 목표로 삼았다. 일부 구단이 제주(SK 와이번스), 거제(한화 이글스), 부산 기장(KT 위즈) 등에서 합숙훈련을 하기에 더욱 그렇다. KBO와 10개 구단 실무 관계자들은 캠프 개막이 다가온 1월 20일 코로나19 태스크포스 회의를 열고 머리를 맞댔다. 정규시즌보다 강화된 ‘스프링캠프 코로나19 대응 매뉴얼’의 세부 내용을 확정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건 ‘코로나19 의무 검사’다. 1월 25일까지 전 구단이 KBO에 캠프 참가자 명단을 보내면, 명단 속 인원 모두 1월 30일까지 음성 확인서를 제출해야 캠프에 참가할 수 있게 했다. 각 구단 감독, 코치진, 선수단 외에도 이들과 밀접 접촉하는 트레이너, 훈련 보조 요원, 통역, 매니저, 식당 종사자 등이 모두 코로나19 진단 검사를 거쳤다.
KBO 관계자는 “명단 제출 이전에 받은 검사 결과는 무효다. 검사일이 25일 이후로 찍힌 음성 확인서만 인정했다. 또 결과의 변수를 없애기 위해, 각 구단에 ‘검사 후부터 훈련 시작 전까지는 외부인과 접촉을 최대한 자제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설명했다.
많은 야구 관계자가 검사를 앞두고 불안에 떨었다. 한 구단 운영팀 관계자는 “확진자들 중에 관련 증상이 그리 심하지 않은 환자도 종종 발견됐다고 들었다. 행여 전수 조사에서 ‘무증상 감염자’가 나올까 봐 많은 팀이 긴장했다. 선수 한 명만 감염돼도 팀 전체가 훈련을 중단해야 하는 비상 상황이라서 더 그랬다”고 귀띔했다.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10개 구단 캠프에 참가하는 선수단과 프런트, 그 외 밀접 접촉 관계자 1723명이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았다. 1·2군 선수 776명, 감독 및 코치진 255명, 구단 프런트 및 관계자 692명이 첫 관문을 ‘무사통과’했다. 물론 캠프 시작일 이후 합류하는 선수나 관계자, 심판위원도 반드시 코로나19 음성 확인서를 제출해야 한다. 입국 직후와 2주일 자가격리 해제 시점에 두 차례 코로나19 진단 검사를 받는 외국인 선수들에 한해서만 서류 제출이 면제된다.
물론 긴장을 늦출 순 없다. 선수단은 캠프 시작 후 외부인과 철저히 분리된 채 생활하고 있다. 야구장 내 식사는 선수단만 이용하는 별도 공간에서 하고, 식당 내에 투명 칸막이를 설치했다. 외부 숙소에서도 다른 투숙객과 접촉하지 않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 식사한다. 구단 공식 일정 외에는 타 구단 선수 및 관계자와의 사적 만남 역시 자제를 권고하고 있다. 그라운드를 제외한 모든 공간에서의 마스크 착용은 당연히 필수다.
방역 지침 위반 시 제재도 강력해졌다. KBO 관계자는 “선수단의 방역지침 위반 사실이 언론, 소셜미디어, 민원 제보 등을 통해 알려지면 KBO 규약에 명시된 ‘품위 손상 행위’로 간주해 처벌할 계획이다. 코로나19 확진 선수, 확진자를 밀접 접촉한 선수, 확진자 동선을 방문한 선수, 관련 증상이 나타난 선수가 구단에 보고하지 않거나 진단 검사 및 검사 결과 제출을 거부하는 행동 역시 품위 손상으로 분류된다”고 강조했다. 야구장을 ‘코로나19 청정 지역’으로 만들려는 노력이다.
SK 와이번스의 이름으로는 마지막으로 열리는 스프링캠프에 많은 눈길이 쏠렸다. 사진=연합뉴스
#신세계도, SK도 아닌 ‘인천’ 팀의 캠프
캠프 첫 날, 야구계의 관심이 집중된 곳은 단연 제주 서귀포시 강창학야구장이었다. 곧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SK 와이번스가 신세계그룹 이마트에 매각된 뒤 첫 캠프를 시작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팀 이름도 정해지지 않았고, 새 유니폼도 지급되기 전이지만, ‘SK’의 이름으로 치르는 마지막 캠프 현장을 담기 위해 많은 취재진이 몰렸다. SK 홍보팀 관계자는 “국내 20여 개 매체가 취재 신청을 했다”고 귀띔했다.
선수들은 여느 때처럼 붉은색 유니폼을 입고 훈련장에 도착했다. 비가 내린 탓에 실내 훈련장에 먼저 모였고, 주장 이재원의 선창을 따라 “파이팅!”을 외친 뒤 본격적으로 몸을 풀었다. ‘SK’ 혹은 ‘와이번스’라는 단어를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평소와 다름없이 밝았다.
이재원은 “훈련장에 나오기 전 SK 유니폼을 입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한 달 뒤면 이 유니폼을 입지 못한다는 생각이 났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미 많은 SK 선수가 구단 매각의 긍정적인 면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뒤다. SK가 창단할 때 프로에 입단해 ‘원클럽맨’으로 몸 담았던 최고참 김강민은 “SK라는 이름에 남다른 애착이 있는 만큼, 처음 매각 소식을 들었을 때 충격이 컸다. 하지만 신세계그룹이 코로나19 여파로 경기가 침체된 상황에서도 프로야구단을 인수했다는 건 대단한 일 같다. 그만큼 야구단 운영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아니겠나”라고 반문했다.
김강민은 또 “선수들도 이제 신세계그룹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팬들이 예전처럼 우리 선수단을 응원해주셨으면 좋겠다. 선수들도 마음을 강하게 먹고 새 시즌을 준비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신세계그룹 야구단의 초대 주장이 된 이재원 역시 “처음 매각 결정이 발표된 뒤 심적으로 힘들고 혼란스럽긴 했지만, 이제는 새로운 명문구단으로 도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SK에서 지켜오던 좋은 분위기를 새로운 팀에서도 이어가고 싶다”고 다짐했다.
신세계그룹 이마트와 SK텔레콤은 2월 23일 정식 계약서에 사인할 예정이다. 그때까지는 ‘SK 와이번스’라는 이름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신세계그룹과 SK 구단 프런트는 서서히 ‘와이번스’의 색을 지울 준비를 시작했다. 새 시즌을 새 이름으로 출발해야 하는 만큼, 선수단과 팬 모두 자연스럽게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해서다. 공식 인터뷰 때 감독과 선수 뒤에 드리우는 백드롭에도 ‘SK’라는 구단명 대신 연고지 ‘인천(INCHEON)’을 새겨 넣었다. 또 기존 팀 유니폼 컬러인 붉은색 대신 회색을 사용해 백드롭을 제작했다.
SK 관계자는 “원래는 백드롭에 신세계그룹 이미지를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공식 계약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라 그룹 측에서 ‘인천’을 쓰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귀띔했다.
신세계그룹은 다양한 방식으로 후방 지원을 하고 있다. 그룹 계열사인 스타벅스 코리아의 커피를 SK 선수단에 아낌없이 제공하는 중이다. 캠프 이틀째인 2월 2일부터 스타벅스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100잔이 매일 강창학 야구장에 도착하고 있다. 가장 큰 벤티 사이즈로 준비해 양도 넉넉하다. SK 관계자는 “캠프가 종료되는 3월 5일까지, 휴식일에도 빼놓지 않고 하루 100잔의 스타벅스 커피가 제공될 것”이라고 했다. 선수들이 마실 커피값만 1600만 원에 달할 거라는 후문이다.
반응은 당연히 뜨겁다. 커피 외에도 일부 선수의 취향에 맞춘 음료도 함께 제공되고 있다. 미국 출국을 앞두고 친정팀 SK 동료들과 제주에서 함께 훈련한 김광현(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역시 캠프지에 도착하자마자 “내 스타벅스 커피는 어디 있느냐”고 농담을 던졌을 정도다. 선수들의 커피를 담당하는 스타벅스 서귀포DT 점도 매일 아침 대량의 커피를 준비하느라 덩달아 바쁘다.
#비닐하우스의 유행
국내 스프링캠프의 가장 큰 적은 역시 추위다. 많은 구단이 실내에서 적당한 훈련 장소를 찾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심지어 캠프 시작 후 눈이나 비가 내린 지역도 있어 선수들이 더 애를 먹었다. 홈구장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훈련하는 KIA 타이거즈는 비에 젖은 그라운드에서의 부상 위험을 피하기 위해 야구장 지하 주차장을 임시로 이용했을 정도다. KIA 나지완은 “한국에서 캠프를 하는 건 프로 14년 만에 처음인데, 지하 주차장에서 러닝을 하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맷 윌리엄스 KIA 감독은 “날씨나 운동장 상황이 좋지 않아 초반에는 스트레칭 위주로 가볍게 훈련했다”고 설명했다.
부산 사직구장에 캠프를 차린 롯데 자이언츠는 고육지책으로 설치한 비닐하우스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약 800만 원을 들여 1루와 3루 불펜 쪽에 커다란 비닐을 씌웠는데, 내부 공기를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어 선수들의 만족도가 무척 높다는 전언이다. 특히 추위에 민감한 투수들의 불펜 피칭 때 효과가 극대화된다. 롯데 투수 서준원은 “부상을 조심해야 하는 시기인데, 비닐하우스 안에 들어가면 몸이 녹는 느낌이다. 바깥은 춥지만, 내부는 대만이나 호주만큼이나 따뜻해서 불편함이 없다”고 설명했다.
홈구장을 거점으로 삼은 KIA와 NC 다이노스도 이미 그라운드에서 비닐하우스를 활용하고 있다. 2월 16일부터 거제를 떠나 대전 홈으로 옮기는 한화 역시 비닐하우스 설치 준비를 마쳤다.
#합숙파 vs 출퇴근파, 장점이 다르다
국내 캠프의 또 다른 특징은 팀에 따라 ‘합숙파’와 ‘출퇴근파’로 나뉜다는 점. 합숙은 주로 수도권 구단들이 한다. 유일하게 돔구장을 홈으로 쓰는 키움 히어로즈만 서울에 남았을 뿐, 두산과 LG 트윈스는 2군 실내 구장이 있는 경기도 이천에서 합숙 훈련을 하고 있다. 수원의 KT와 대전의 한화도 훈련지를 남쪽으로 정한 터라 합숙이 불가피하다. 특히 한화는 훈련지인 거제에 마침 모기업이 운영하는 한화리조트 거제 벨버디어가 있어 좋은 점이 많다. 리조트 측에서 선수단에 별도의 대형 연회장을 식당으로 제공했고, 피트니스 센터 역시 일반 투숙객과 분리해 사용할 수 있도록 먼저 조처했다.
반면 남부 지방이 연고인 삼성 라이온즈(대구)와 KIA, NC(창원)는 홈구장에 캠프를 차린 덕에 자택 출퇴근이 가능하다. 서울에 있는 키움 역시 선수들이 집에서 숙식하면서 야구장을 오간다. 다만 홈구장을 활용하는 팀들 가운데선 롯데가 유일하게 합숙을 선택했다.
처음엔 롯데도 선수들에게 출퇴근 방침을 전달할 계획이었다. 코로나19로 전 구단이 재정난을 겪는 상황이라 출퇴근 훈련시 선수단 숙박비와 식비 등 비용 절감 효과가 크다. 롯데가 2군 훈련장인 김해 상동야구장 대신 사직구장을 캠프지로 결정한 데에도 이 같은 이유가 한몫했다. 그러나 신임 주장 전준우의 제안이 구단의 마음을 돌렸다.
전준우는 “해외 캠프 때는 늘 선수들이 함께 지낸다. 국내에 있더라도 선수들이 팀워크를 다지고 서로를 좀 더 알아가려면, 합숙 훈련의 플러스 요인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캠프 효과를 더 높이기 위해 구단에 합숙을 건의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롯데 구단은 모기업의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다. 그룹 도움을 받아 부산 서면에 있는 계열사 롯데호텔을 선수단 숙소로 삼았다. 사직구장에서 구단 버스로 15분이면 도착하는 곳이다. 허문회 롯데 감독은 “집에서 오전 훈련을 하러 나오려면 길이 많이 막힌다. 이동 시간을 줄이고 싶었는데, 구단에서 잘 지원해줬다. 선수들도 원했던 일이라 ‘윈윈’인 거 같다”고 했다.
구단 관계자 역시 “확실히 출퇴근보다 합숙 훈련의 집중도가 높을 거라고 판단했다. 가족이 많은 선수들은 퇴근 후 컨디션 관리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합숙보다 ‘출퇴근’을 선호하는 쪽도 있다. NC 박민우는 “집에서 야구장을 왔다 갔다 하면서 부모님이 해주시는 밥을 먹고 운동하니 더 좋은 면도 있다. 이게 국내 캠프의 장점인 거 같다”고 말했다. 감독 첫 시즌 스프링캠프를 국내에서 출퇴근하면서 치르게 된 홍원기 키움 감독도 “해외 스프링캠프는 훈련량이 많아서가 아니라 매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반복하기 때문에 힘든 것”이라며 ‘출퇴근파’의 손을 들어줬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