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오른쪽)와 김태년 원내대표는 산재가 발생한 포스코에 대해 직접 비판에 나섰다. 사진=박은숙 기자
#중대재해처벌법 통과 이후에도 잇따른 산재
오는 2월 22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열고 고용노동부로부터 산업재해 현황과 대책 등에 관한 보고를 받은 뒤 청문회를 개최한다. 최근 노동자 사망사고나 화학물질 누출사고가 발생한 대기업 9곳의 대표이사가 증인으로 출석한다. 현대·GS·포스코건설(이상 건설사), LG디스플레이·현대중공업·포스코(제조), 쿠팡·CJ대한통운·롯데글로벌로지스(택배)가 대상 기업군이다.
산업재해는 수년째 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였다. 결국 지난 1월 8일 국회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이 통과됐다. 내년 1월부터 산재 또는 사고로 노동자가 사망하면 해당 사업주나 경영 책임자는 1년 이상 징역이나 10억 원 이하 벌금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법안은 통과됐지만 산재로 인한 사망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2월 8일 포스코 포항제철소에서 하청업체 직원 A 씨는 컨베이어 정비 중 설비와 크레인 사이에 끼어 사망했고, 2월 5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대조립1공장에서 노동자가 철판에 머리를 맞아 숨졌다. 앞서 지난 1월 11월엔 쿠팡 노동자 B 씨가 밤샘 근무 이후 쓰러졌고 결국 생을 마감했다(관련기사 [단독] 쿠팡 물류센터 사망자, 영하 10도에 핫팩 하나로 버텨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치권이 발 빠르게 비판의 날을 세웠다. 2월 10일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중대재해법 등 관련 법률이 제정되고 사회적 논의와 대책이 마련되고 있음에도 대기업에서 산재 사고가 반복되는 현상에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2월 15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세계적 철강기업 포스코에서 산재 사고가 반복되는데도 안전조치를 취하기는커녕 무책임한 태도가 계속되는 데 대해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청문회에 나서는 나머지 기업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해 산재 사고 사망자(882명) 중에서 건설업이 51.9%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송옥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받은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2017~2019년 산재 사망자가 가장 많은 건설사는 포스코건설(19명), 대우건설(14명), 현대건설(12명), GS건설(11명)이다. 1월 13일 LG디스플레이 공장에서 독성 화학물질이 누출돼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특히 택배업계는 지난해 과로사로 추정되는 노동자가 16명에 달한다. CJ대한통운(6명), 쿠팡(4명), 한진택배(2명)와 롯데글로벌로지스, 우체국, 로젠, 건영 소속 택배 노동자가 각각 1명씩 숨졌다.
상장을 준비 중인 기업에게 잇따른 산재 사망 사건은 부담이 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청문회 앞두고 ‘바쁘다, 바빠~’
이번 청문회가 유독 부담스러운 기업들이 있다. 2월 12일(현지시각) 쿠팡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공시를 통해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을 위한 신고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김범석 이사회 의장이 쿠팡 창업과 함께 IPO 의지를 밝힌 지 10년 만이다. 1월 26일 현대중공업그룹은 비상장 계열사인 현대중공업의 IPO를 연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상장으로 자금을 마련해 친환경 선박과 자율운항 선박 등 미래사업에 1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국내외 기관투자자들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투자의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노동자 사망 사건으로 IPO에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단 뜻이다. 실제 쿠팡에 1억 달러를 투자한 블랙록을 포함해 SSGA, UBS, Barclay 등 세계 주요 금융사는 ESG 평가를 투자 포트폴리오 비중 및 주주권 행사에 적극 반영하고 있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국민연금은 2021년 ESG 투자를 본격화하기 위해 ‘국내주식 ESG 평가 체계 개선 및 국내채권 ESG 평가체계 구축’ 외부 연구 용역을 완료했다.
강봉주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미국, 유럽의 주요 연기금 및 운용사들은 ESG 등급을 포트폴리오 내 투자 비중 조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이에 관련한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도 강화하고 있다”며 “이는 ESG 이슈가 일반 투자자들의 관심 및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며 환경, 사회적 가치 등 ESG의 핵심 철학이 글로벌 이슈로 공론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공모액의 50~60%를 차지하는 기관투자자를 무시할 수 없다. 현대중공업과 달리 상장 시한이 촉박한 쿠팡이 적극적으로 산재 이슈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이유다. 2월 9일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하다가 과로사한 직원이 산재로 인정되자마자 곧바로 쿠팡은 사과문을 게재하기도 했다(관련기사 [단독] 쿠팡 노동자 고 장덕준 씨 산재 인정, 사측 첫 공식 사과).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쿠팡 상장 신청서를 살펴보면 산재 등 ESG 관련해서 방어를 잘했다”면서도 “청문회나 산재 인정이 상장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도 진화에 나섰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 따르면 현대중공업그룹 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의 ESG등급은 B+다. 문제는 IPO 주목적이 ESG 강화인데, 산재로 인해 등급이 더 낮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2월 16일 한영석 현대중공업 대표는 산재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겠다고 진화에 나섰다.
최정우 포스코그룹 회장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다. 최정우 회장 등 8명 이사의 임기가 모두 오는 3월에 만료된다. 주주총회에서 연임이 확정될 것으로 보였던 최 회장은 최근 정치권과 시민단체로부터 집중포화를 받고 있다. 그동안 심각한 지역 환경오염, 직업성 암, 산업재해 등을 포스코가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번 청문회를 주도한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은 “대표이사가 직접 진두지휘해야 하는 산업안전보건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립했는지, 영업이익을 위해서 산재를 가벼이 보는 건 아닌지 등을 논의할 방침이다. 특히 포스코는 산재 예방을 위해서 1조 원을 투자했다고 홍보했음에도 산재가 끊이지 않고 있어서 예산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낙연 대표는 “포스코건설, 포항제철, 광양제철 등 3곳에서 5년 동안 42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시민단체와 노동계가 최악의 기업으로 뽑았을 정도”라며 “국민연금은 포스코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국민기업이 되도록 스튜어드십코드를 제대로 실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최정우 회장은 대국민 사과에 나섰다. 최 회장은 2월 16일 사고 현장인 포항제철소 원료부두를 방문해 안전관리상황을 점검하면서 유족 등에 머리를 숙였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