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대표자회의에 참석한 김정은의 모습이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됐다. 작은 사진은 김정일 위원장의 부인 고영희(위)와 비서 출신 김옥. 연합뉴스 |
지난 10여 년간 북한의 후계구도를 취재일선에서 추적해온 북한 전문기자 이영종 씨(중앙일보)가 쓴 <후계자 김정은>(늘품플러스)에서 김정일 일가의 알려지지 않은 비화들을 들여다봤다.
“우리 김 대장 발걸음 2월의 위업 받들어”
2009년 10월 9일 밤 북한 정보분석관이 갑자기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TV 스크린이었다. 그가 응시하는 화면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동당 고위 간부들을 대동하고 공연을 관람 중인 장면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를 긴장시킨 것은 단 세 글자였다. 공연 해설을 위한 전광판에 ‘발걸음’이란 단어가 등장한 것. 발걸음은 북한 내부에서 김정은을 찬양하기 위한 노래로 알려져 있었다. 이 노래를 김 위원장은 물론 노동당 고위관계자들이 공식석상에서 함께 들었다는 것은 그동안 의문으로만 남아 있었던 북한 3대 세습 후계 체제의 서막과 함께 김정은이라는 유력한 후계자의 등장을 알리는 단서였다.
이 사실이 알려진 김정은은 유력한 북한 후계자로 급부상했다. 김정은의 얼굴과 성격 등 작은 정보도 엄청난 이슈가 됐다. 이러한 열기 때문에 김 위원장을 빼닮은 한국의 40대 남성이 일본 언론에 의해 김정은으로 보도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이러한 광적인 열기에 당황한 북한 측은 급히 진화에 나섰다. 최고위급 인사까지 나서 연막을 쳤다. ‘발걸음’ 공연관람 장면이 보도된 이튿날 최고인민회의 김영남 상임위원장까지 나서 “후계논의는 진행되고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발걸음’이란 노래 역시 이후 북한 내부에서 금지되는 분위기였다. 건강 이상설에 휩싸였던 김 위원장은 건강한 모습으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며 후계 작업 중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김정은으로의 후계자 내정이 은밀히 진행되고 있다는 단서는 대만의 한 관광객이 찍은 사진에서 또다시 드러났다. 원산의 한 협동농장에서 2009년 9월 18일자에 촬영한 사진이 포털사이트에 등장한 것. 북한의 선전포스터를 촬영한 이 사진은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북한군 창건기념일인 4월 25일을 상징하는 숫자가 쓰인 벽보형 포스터에는 김정은이 ‘만경대 혈통, 백두의 혈통을 이은 청년대장 김정은 동지’라고 표현돼 있었다. 특히 벽보에 나타난 김정은의 이름은 붉은색으로 부각돼 있었는데 김일성과 김정일의 이름만이 컬러로 발행되는 출판물에 붉은 글씨로 더 굵고 진하게 표기되는 것과 맥락을 같이했다. 관광객이 호기심에 찍은 벽보 한 장이 북한 후계구도의 진도를 외부에 알리는 대박을 친 셈이다.
이 같은 결정적인 단서들이 외부에 알려졌음에도 북한은 김정은 감추기를 계속했다. 후계자 내정 발표 이후 그의 지난 업적을 미화시켜 한꺼번에 발표하려는 북한의 계획이었다. 북한이 입을 다물수록 그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한 정보기관과 언론의 관심은 극에 달했다. 이때 집중 취대 대상이 된 것은 스위스 베른의 한 공립학교였다. 이곳은 김정은이 유학생활을 한 곳으로 알려지며 학생으로서의 그의 면모와 성격, 정치적 성향을 분석하려는 취재 인파로 붐볐다. 학교 관계자들은 취재에 응하며 다양한 단서들을 남겼다.
김정은이 재학할 당시 수학교사였던 브르 교장은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렸으며 농구를 즐겨했다. 상당한 팀워크를 형성하는 능력이 있었고, 친구들 간의 다툼이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중재했다”고 전했다. 특히 미국 대사관 자녀들과도 친분을 쌓으며 서방 친구들과 교류했다는 점은 그의 이념적 개방성을 짐작케 할 만한 대목이었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군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연합뉴스 |
그는 외국생활을 접은 후 2002년부터 김일성군사종합대학으로 돌아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북한식 군사교육과 이데올로기를 학습했다. 학교를 다닐 당시 조직 장악력과 리더십을 갖춰 자신의 추종세력을 구축하는 데 상당한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보다 축구를 좋아했던 10대 소년은 점차 후계자 낙점의 야심을 드러내는 행보도 보였다. 한 가지 예로 그는 김 위원장의 군부대 시찰에 앞서 경호를 사전 점검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현장 답사를 하기도 했다. 또 김 위원장 앞에서 선군정치를 찬양하고 혁명 계승을 외치는 등 후계자 계승을 염두에 둔 주도면밀함도 보였다.
10대 땐 서방세계에서 온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김정은이었지만 정치적 야심과 함께 개방성은 조금씩 닫혀 갔다. 아버지 김정일의 일식 전담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라는 일본인은 식사 자리에서 부자가 나눈 대화와 모습, 표정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김정은을 떠올리며 “악수할 때마다 ‘증오스런 일본놈’이라고 생각하는 듯 험악한 얼굴로 노려봤다”고 전했다. 언행에서 느껴지는 품성 역시 “악착같고 고집이 셌다”고 전한다.
그가 관찰한 김정은의 리더십도 주목해볼 만한 대목이다. 김정은은 친구들과 농구를 할 때면 유약한 성격으로 알려진 형 김정철과 달리 패배의 원인을 조목조목 따지며 개선사항을 고민하고서야 자리를 뜨는 성격이었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은 자주 식사자리에서 그런 김정은의 태도와 모습을 자신과 빼다 닮았다며 칭찬했다고 한다.
책에서는 그의 출생의 비밀 역시 풀리지 않는 과제로 언급돼 있다. 생모가 고영희가 아닌 김 위원장의 비서격인 김옥이라는 설이 그것이다. 고위 탈북자들은 이것은 북한 내부 핵심관계자만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
‘설’ 뜨면 해외까지 추적
<후계자 김정은>에는 북한의 후계세습과정뿐 아니라 다섯 아내의 아버지이자 배다른 자녀 여섯 명을 둔 가장 김정일의 사적인 이야기들도 기록돼 있다. 어떻게 이러한 추적이 가능했을까.
10월 13일 저자 이영종 기자를 만나 출판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20년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북한의 ‘로열패밀리’를 추적하는 과정은 상상만큼이나 험난했다고 한다. 김정남을 찾아, 그의 생모 성혜림을 찾기 위해 서방국가를 떠돌기도 했다. 본인을 만날 수 없다면 일가 친척, 측근들의 동향을 파악해 접근했다. 김정일 후계자 내정 당시 은둔한 이복형제들의 이후의 삶도 추적했다. 북한 전문 교수들과 탈북자들이 주된 취재원이었다.
가설로만 존재하는 것을 실제로 밝히는 작업을 하는 동안 이 기자는 “성공한 것보다 실패한 사례가 무수히 많았다”고 토로했다. 낭설로 생각되는 경우에도 작은 가능성만 보이면 무조건 비행기를 탔다. 그 과정에서 겪은 에피소드도 책에 소상히 기록돼 있다.
이 기자가 북한의 일상 및 김정일의 이면을 추적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실향민이었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북한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자연스레 북한의 현재 진행형을 풀어내는 이야기꾼으로 살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김정일 일가의 비화들은 알고 보면 ‘출생의 비밀’을 소재로 한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다. 독자들에게 이 책이 좋은 이야깃거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출판 소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