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배구선수 이재영, 이다영 선수에게 과거 학교폭력 논란으로 ‘무기한 출전 정지’ 징계가 내려졌다. 사진=KOVO 제공
#‘학폭’은 평생의 트라우마
“10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그때’ 일 때문에 내가 쓸모없는 인간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A 씨(27)는 학교폭력 피해자다. 중학교 동창 3명과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항상 붙어다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친구들이 A 씨를 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동수업 시간에만 A 씨를 두고 갔다. 이후로 점심 시간, 체육 시간, 수련회에서도 A 씨는 혼자가 됐다. 수업 중간에는 자신을 제외하고 주고받는 쪽지에 뒤통수를 맞은 적도 있었다. 화장실에서 자신을 향한 욕설을 들은 이후로는 화장실도 가지 못해 저녁 시간이면 집까지 뛰어갔다 오곤 했다.
문제는 17세의 기억이 10년이 지난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A 씨는 “죽고 싶은 1년이었다. 지금은 사람을 쉽게 믿기 힘들고 누구든 나를 쉽게 떠날까봐 전전긍긍하는 면이 생겼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내가 그럴 만한 행동을 했나 보다’하고 자책부터 한다. 상처는 평생 꼬리표처럼 나를 따라다닐 텐데 나는 내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이유조차 모른다. 가끔 SNS에서 그 친구들이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물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동급생에게 따돌림을 당해 극단적 선택을 한 B 양(당시 14)의 유가족 역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가해자들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했다. 지연된 정의라도 좋다. 지금이라도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다른 피해자들도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내 아이의 잘못으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유명인 가해자 잘 되니 배 아파”
한편 연예인 등 유명인 가해자를 향한 폭로에 ‘가해자가 부러워서 괜히 과거 일을 들추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부정하지 않았다. 또 다른 학교폭력 피해자 C 씨는 “사람인데 당연하지 않겠나. 가해자가 잘되니 배가 아프고 억울하다”고 말했다.
중학교 시절 C 씨를 괴롭힌 건 소위 말하는 ‘일진’ 무리였다. 다른 반이었던 가해자들은 쉬는 시간마다 C 씨를 찾아왔다. 폭행은 주로 교실 뒤편에 위치한 사물함 앞에서 이뤄졌다. 이들은 C 씨를 에워싸고 복싱 연습인 ‘스파링’을 하자며 달려들었다. 그때마다 C 씨는 두 팔로 자신의 배를 움켜쥐고 허리를 동그랗게 말았다. 무리의 우두머리였던 가해자는 사물함에 걸터앉아 ‘낄낄’ 웃으며 C 씨를 지켜봤다고 했다. 몇 년 뒤, 가해자를 다시 본 건 TV 화면에서였다. 그는 잘나가는 ‘일진’에서 잘나가는 ‘연예인’이 되어 있었다.
“처음엔 무서웠다. TV 화면인데도 눈을 못 쳐다봤을 정도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억울해졌다. 내가 정말 힘들었을 때 그 친구는 굉장히 잘됐으니까. 중학교 3년 내내 나쁜 짓을 하고도 승승장구하는 가해자를 보면서 평범하게 살아온 내 인생 전체가부정당하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릴 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열등감의 대상이 된 셈이다.”
그러나 C 씨는 다른 피해자처럼 폭로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는 “나는 힘도 돈도 없다. 내가 가진 건 괴롭힘을 당했다는 기억뿐이다. 학교폭력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증거도 거의 없다. 만약 고소라도 당하면 나를 위해 법원에서 증인을 자처할 동창도 많지 않을 것 같다”며 “지금 폭로자들은 이 부분까지 감수하고 억울함을 표출하고 있으니 오히려 용기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학교가 해결 못한 학교폭력
학교폭력 피해자들은 학교의 대처가 미온적이라고 말했다. 사진=연합뉴스
과거의 문제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이유는 제때 제대로 된 해결을 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일요신문이 만난 학교폭력의 피해자들은 모두 학교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학교는 이들의 피해를 ‘경미한 수준’으로 판단했다.
A 씨의 담임교사는 A 씨에게 “마음이 맞는 다른 친구들을 사귀어 보라”고 조언했고 B 양의 따돌림은 경미한 사건으로 분류돼 학교장 자체 종결됐다. C 씨는 가해자의 보복이 두려워 가해자를 신고하지 못했다. 학교는 ‘일진’ 무리가 C 씨를 포함한 다른 학생들을 괴롭힌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으나 피해자의 신고가 없다는 이유로 별 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학교폭력예방법) 2조는 “‘학교폭력’이란 학교 내외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발생한 상해, 폭행, 감금, 협박, 약취·유인, 명예훼손·모욕, 공갈, 강요·강제적인 심부름 및 성폭력, 따돌림, 사이버 따돌림,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음란·폭력 정보 등에 의하여 신체·정신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물리적 폭행을 당해야만 제대로 된 학교폭력의 피해자로 넉넉히 인정되는 경우가 다수다. 언어폭력, 사이버폭력, 따돌림에 대해서는 대체로 학교장 자체 해결로 종결되거나 경미한 수준의 징계로 끝난다. 현행법상 경미한 학교폭력의 경우 학생부에 기재되지도 않아 가해자에게 유리한 구조라는 비판도 따르고 있다. 한편 교육부가 지난 1월 발표한 ‘2020년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사이버 폭력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학생의 비율은 12.3%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학교폭력 방지 대책과 피해자 구제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청소년 심리상담 Wee(위)센터 관계자는 “피해 회복에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가해자 처벌과 태도다. 특히 피해자와 가해자 간 관계회복 여부는 학교폭력이 피해자에게 트라우마로 남을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며 “교우 갈등이 발생하면 그것이 학교폭력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것에 천착하기보다 갈등 주체 간 관계회복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제대로 봉합되지 않은 갈등은 언제든지 따돌림 등의 폭력으로 발현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