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읍 의원이 “김경수 도지사 변호인이었던 홍기태 변호사를 사법정책연구원장에 앉힌 것도 법원에 어떤 시그널을 준 것 아니냐”고 질문하자 “홍 변호사가 김경수 도지사의 변호를 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답했다. 장제원 의원이 “대국민 사과 성명이라도 발표해야 한다”고 말하고 조수진 의원까지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 국회 출석을 적극 검토하라”고 말하자 그제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자진사퇴와 탄핵 압박에 휩싸여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사법농단 수사 때부터 리더십 흔들
2월 17일 대법원을 항의 방문한 국민의힘 법사위원 6명과 김명수 대법원장의 만남에서 오간 대화다. 이날 오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이 김명수 대법원장 출석을 요구했지만 안건이 부결되자 국민의힘 의원들은 직접 대법원을 방문했다. 국회의원의 항의 방문, 자칫 사법부의 수장 대법원장이 정치인 외압에 노출되는 듯한 상황이 연출됐지만 김명수 대법원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분명 야당 국회의원의 항의 방문엔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청와대와 여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법부의 수장일까’라는 질문이 김명수 대법원장을 사면초가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현재 김명수 대법원장을 둘러싼 논란의 표면적인 이유는 임성근 부장판사 사표 반려 관련 거짓말이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정치권의 눈치를 보며 동조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법원 내부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의 리더십이 흔들리기 시작한 지는 이미 꽤 됐다. 대법원장이 정치권 공세에 무기력하고 정치권 눈치만 본다는 이유에서다. 2017년 9월 취임 이후 법원 내부에서 조금씩 쌓여 가던 법원 내부의 불만이 본격적으로 터져 나온 것은 2019년 1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됐을 당시다.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며 숨죽이고 있던 법원 내부 분위기는 전직 대법원장 최초의 피의자 신분 검찰 출두로 요동을 쳤고 안철상 법원행정처장까지 임기 1년 만에 사의를 밝히면서 김명수 대법원장의 리더십이 크게 흔들렸다. 부장판사급 이상 고위직을 중심으로 김명수 대법원장이 법원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흘러나왔다.
2020년 들어서도 법원 내에서 김명수 리더십은 계속 흔들렸다. 특히 각종 판결을 두고 정치권의 공세가 이어졌는데 그때마다 김 대법원장은 판사들에게 ‘흔들리지 말라’는 당부만 거듭했을 뿐이다. 익명을 요구한 법원 내부 관계자는 “사법부의 수장이 법원을 지키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 채 정치권 눈치만 보는 듯한 모양새가 연출돼 불만의 목소리가 컸다”라며 “다만 법원도 조직만 지키려고 하는 검찰처럼 보일 수 있어 내부 불만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특히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아내 정경심 동양대 교수 사건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방법원 임정엽 부장판사와 광복절 당시 광화문 집회를 허용한 서울행정법원 박형순 부장판사 등에 대한 정치권 공세가 극심했다. 일부 여당 국회의원들이 ‘판새’ ‘그 판사’ 등의 표현까지 사용했고 심지어 해당 판사의 실명이 들어간 ‘박형순 금지법(집회시위법 및 행정소송법 개정안)’까지 발의됐다. 당시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청와대 눈치를 많이 본다는 소문을 듣고도 설마 했는데 대법원마저 판사들을 위해 맞서기보다는 정치권 눈치보기에 급급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논란은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됐다. 대법원 앞에 놓인 김명수 대법원장 사퇴 촉구 근조화환들. 사진=이종현 기자
#정치권 움직임 염두 발언 담긴 녹취록
2월 4일 국회에서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탄핵안이 가결된 후 법원 내부에선 ‘김명수 책임론’이 등장했다. 여기에 거짓말 논란까지 더해지면서 이제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됐다. 임성근 부장판사의 사표를 지난해 5월과 12월 두 차례나 김 대법원장이 반려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애초 김 대법원장은 “그런 적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임 부장판사의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거짓말이 드러났다.
녹취록에는 “오늘 그냥 (사표를) 수리해버리면 (국회가) 탄핵 얘기를 못 하잖아. 그런 비난을 받는 것은 굉장히 적절하지 않다” “이제 사표 수리 제출 그러한 법률적인 것은 차치하고 나로서는 여러 영향이랄까 뭐 그걸 생각해야 한다” 등의 김명수 대법원장 발언이 담겨 있다. 대법원장이 정치권 움직임을 염두에 둔 듯한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공개됐다.
최근 이뤄진 법원 정기 인사도 논란이 되고 있다. 우선 법원행정처 직원을 통해 법원장 승진이 유력한 한 부장판사에게 “대법원장이 부담스러워하신다”는 취지의 말을 전달해 사실상 사직을 종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김 대법원장이 ‘내치기 인사’를 했다는 의혹인데 중앙일보는 2020년 1월 정기인사를 앞두고도 법원에서 비슷한 의혹이 제기됐었다고 보도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회식 자리에서 대법관과 법원장으로 승진이 유력해 보이는 판사 두 명을 언급하며 그들은 승진이 돼선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었다는 것이다. 결국 두 판사는 승진하지 못하고 사표를 냈다.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 그리고 판사 블랙리스트 조사 참여 법관들이 서울중앙지법 요직을 차지했다는 ‘코드 인사’ 의혹도 있다. 성지용 신임 서울중앙지법원장은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으로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진상조사단에도 참가했었다. 또한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로 임명된 고연금 부장판사 역시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며 판사 블랙리스트 조사에 참여했다.
2월 4일 국회에서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탄핵안이 가결되면서 법원 내부에서는 ‘김명수 책임론’이 등장했다. 국회 본회의에서 임성근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뒤 이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는 국민의힘 의원들 모습. 사진=박은숙 기자
#내치기에 코드인사 논란까지
그런가 하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을 맡은 윤종섭 형사36부 부장판사는 이번 인사에서 유임돼 6년째 서울중앙지법에서 근무하게 됐고 김미리 형사21부 부장판사도 서울중앙지법에 4년째 근무하게 됐다. 한 근무지에서 3년 근무를 채우면 다른 근무지로 순환시키는 것이 법원 인사 관례임을 감안하면 둘 다 ‘관례를 깬 이례적인 인사’다. 특히 형사합의21부 김미리 부장판사는 조국 전 장관 자녀 입시비리사건과 청와대 울산선거 개입 사건, 최강욱 열린민주당 의원 선거법 위반 사건 등 현 정부 관련 사건을 다수 맡고 있다. 김미리 부장판사 역시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다.
법원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법조계 관계자는 “이미 수년 전부터 법원 내부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의 리더십과 신뢰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대법원장이 법원을 보호하는 사법부 수장이라는 믿음이 무너진 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며 “대법원장이 얼마나 내부에서 신뢰를 잃었으면 대화 내용을 녹취하는 상황까지 연출됐겠나”라고 말했다.
현재 김명수 대법원장은 자진사퇴와 탄핵 압박에 휩싸여 있다. 야당은 물론이고 청와대 대변인 출신인 박수현 더불어민주당 홍보소통위원장까지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주장의 결은 야당과 다르다. 박수현 위원장은 채널A ‘김진의 돌직구쇼’에 출연해 “본질은 판사가 판사에 의해 위헌했다고 판결을 받은 건데 김명수 대법원장이 임성근 판사와 대화를 나누며 거짓말한 부분이 강조돼 이 본질을 잃어버리게 한 책임이 있어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결국 김명수 대법원장을 지켜줄 곳도 정치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선 청와대와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도 마찬가지다. 만약 김명수 대법원장이 자진사퇴하거나 탄핵당할 경우 문재인 정부가 임기 5년 차에, 임기 6년의 새로운 대법원장을 임명하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새로운 대법원장의 임기는 2027년까지로 내년에 출범하는 차기 정부(2022~2027년)와 임기 내내 동행해야 한다. 만약 2022년 대선에서 정권이 교체될지라도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한 대법원장과 임기 내내 함께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국민의힘 역시 자진사퇴와 탄핵을 언급하곤 있지만 서서히 김명수 대법원장의 대국민사과 정도로 공세 수위를 낮춰가는 분위기다. 이에 화답하듯 김 대법원장은 19일 법원 내부망에 “국민과 법원 가족 여러분께 혼란을 끼쳐드린 점에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한편 김명수 대법원장의 임기는 2023년 9월까지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