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영 이다영 자매에서 비롯된 배구계 폭력 사태는 박철우의 지난날 아픔을 떠올리게 했다. 박철우는 2009년 국가대표에 소집됐다가 당시 이상열 코치에게 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철우는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이상열 코치한테 맞은 얼굴과 복부를 보여주며 사태의 심각성을 공개했고, 당시 이 코치는 무기한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2년 만에 한국배구연맹 경기운영위원으로 복귀, 경기대 감독과 해설위원을 거쳐 2020년 KB손해보험 스타즈 사령탑에 올랐다.
박철우는 올 시즌을 앞두고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해야만 했다. 자신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긴 가해자와 코트에서 상대팀 감독과 선수로 만나야 했기 때문. 그런데 최근 흥국생명 이재영 이다영의 학교 폭력 사건이 크게 이슈화됐고, 이상열 감독에게 관련 질문이 건네졌는데 이 감독은 ‘경험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박철우의 평정심을 뒤흔들었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의하면 이 감독은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나는 (가해) 경험자이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선수들에게) 당부하고 있다”면서 “인과응보라는 게 있더라. 나 역시 우리 선수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지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기사를 접한 박철우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정말… 피꺼솟이네…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느낌이 이런 것인가…’라는 글을 남겼다. 18일 박철우는 안산 상록수체육관에서 열린 2020∼2021 V리그 OK금융그룹과 경기에서 이긴 다음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대표팀 시절 이상열 감독에게 당한 트라우마를 고백했다. 그는 “더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더 이상 숨고 싶지 않다”는 말로 작심 인터뷰를 이어갔다.
박철우는 2009년 기자회견에서 폭행으로 인한 피해를 공개했다. 사진=연합뉴스
2009년 9월 17일 태릉선수촌에서 아시아남자배구선수권대회를 준비하던 대표팀 선수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강도 높은 훈련을 마쳤고, 훈련이 끝난 뒤 김호철 감독이 선수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한 뒤 훈련장을 떠났다.
그런데 당시 이상열 코치는 김 감독이 자리를 뜨자 인상을 찡그리더니 대뜸 박철우를 가리켜 훈련 태도와 얼굴 표정이 건방지다고 지적했다. 박철우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코치의 언성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박철우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고, 이후 손으로 뺨을 때렸다. 함께 훈련했던 선수들은 당시의 상황이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당시 일요신문 인터뷰에 응했던 A 선수는 이런 설명을 곁들였다.
“철우가 폭행당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선수들은 코치님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더 화를 낼 것이고 철우한테 그 화가 다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맞는 걸 멍하니 지켜보면서 내가 더 눈물이 났다. 우리가 봐도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폭행이었다. 철우가 평소 건방진 태도를 보였거나 훈련에 불성실했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됐을 것이다. 전혀 그런 선수가 아니었다.”
또 다른 B 선수는 그날 오후 훈련을 마치고 선수촌 인근에서 회식이 있었고, 박철우가 그 몸 상태로 회식에 참석했지만 대표팀을 이끌던 김호철 감독이 폭행당한 박철우의 얼굴을 보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철우를 때린 이 코치는 물론 김 감독도 모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식사했고, 그 다음날 LIG랑 연습 경기를 하면서도 표정이 모두 좋았다. 지도자 분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너무 놀랐다. 그날 새벽에 철우가 선수촌에서 이탈했는데 김 감독은 오전 훈련 중 선수들을 모아 놓고 ‘몇 대 맞았다고 도망치는 선수는 필요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의 소속팀(당시 현대캐피탈) 선수가 코치한테 폭행당했는데도 김 감독은 선수의 상태나 입장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
당시 박철우는 일요신문과 인터뷰에서 폭행의 부당함을 주장한 바 있다.
“내가 이렇게 맞을 만큼 태도가 불성실했거나 코치님께 대들거나 그러지 않았다. 지금까지 운동을 하면서 구타는 숙명과도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선배들, 지도자들에게 맞으면서 운동을 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단순히 매를 맞은 게 아니라 폭행 아닌가. 선수가 반성이 아닌 인간적인 모욕감을 느낀다면 문제가 있다고 본다.”
폭행의 가해자인 이상열 당시 코치는 배구협회 관계자에게 “선수가 반항하는 느낌을 줘 감정적으로 대응했다”고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코치는 대한체육회로부터 무기한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2년 만에 ‘2011-2012 V리그’ 경기운영위원을 맡아 배구계로 복귀했고 지금은 KB손해보험 감독을 맡고 있다.
#‘제2의 박철우’가 나오지 않기를
2009년 박철우는 폭행 사건과 관련해 이상열 코치를 형사고소했다가 취하했다. ‘제2의 박철우’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형사고소를 진행했고 후배들이 자신과 같은 일을 당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지만 인간적인 갈등 끝에 고소를 취하한 것이다. 그런데 12년이 지난 2021년 박철우는 상대팀 감독으로 이상열을 만났고, 이 감독의 인터뷰 발언에 이전 상처들이 떠올랐다고 한다.
박철우는 지난 18일 기자들과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가라앉혔던, 간신히 가라앉혔던 흙탕물 같은 것들이, 모래가 다 가라앉아 있는데 그걸 누가 와서 막대기로 젓는 느낌, 그래서 난 되게 뿌옇게 된 느낌이다. 진정으로 변하셨고 사과하셨다면 이런 감정이 남아 있었을까. 좋은 지도자가 되셨다면 이런 감정이 남아 있었을까. 그분이 감독이 되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너무 힘들었는데 경기장에서 마주칠 때마다 정말 쉽지 않았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한 적이 없다. 사과를 바라지 않는다. 처벌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발언을 하고 싶었다. 정당화되는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철우의 인터뷰를 보고 선수와 문자를 주고받았다. 박철우는 이전 일요신문을 통해 자신이 당한 폭행 사실을 공개한 일을 떠올리면서 “지금도 내가 왜 그분한테 맞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몇 년 전 삼성화재 팬 미팅 때 한 어린이 팬이 이런 질문을 했다. ‘박철우 선수는 그때 왜 맞았어요?’라고. 그때 나는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했을 뿐이다. 아닌 걸 아니라고 말했고, 앞으로 그런 일이 생기면 절대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기자회견을 했다’고 설명했다.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다들 경각심을 느끼고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이 운동할 때는 더 나은 환경에서 더 좋은 선수들이 나오길 바란다.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통한다는 걸 느끼고 싶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