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청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왼쪽)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진=임준선 기자
더불어민주당 당헌 제88조는 “대통령 후보자 선출은 대통령 선거일 전 180일까지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민주당은 차기 대선후보를 내년 3월 9일 180일 전인 오는 9월 초까지는 확정해야 한다. 이를 두고 민주당 일각에서 이 당헌을 개정하거나, 차기 대선에서는 예외로 적용하자는 말이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대선 180일 전’에 얽매이지 말고 후보 결정 시기를 늦추자는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야당보다 먼저 후보를 선출해 야당의 공세에 일찍부터 노출시킬 필요가 없고, 야권 후보로 누가 선정되는지 지켜보며 후보를 정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당헌 72조에 따라 대선 120일 전까지 후보자를 선출하도록 하고 있다.
또 코로나19 대확산이 언제 또 발생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예정된 일정대로 하면 대선후보 경선을 흥행 속에 치르기는 어렵다는 점도 경선 연기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백신 접종을 통한 집단면역이 어느 정도 형성된 이후 치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4월 재보궐 선거와 5월 민주당 전당대회 등 정치 일정이 빠듯한 것도 연기의 고려 대상이 될 수 있다.
‘친문’ 전재수 의원은 2월 15일 MBN ‘백운기의 뉴스와이드’에 출연해 “(경선 연기) 논의가 당내에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지 않다”고 전제하면서도 “우리는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시대를 살고 있다. 예정돼 있던 정치 일정도 당내 경선 흥행이라든지, 더 좋은 대선후보를 만들기 위한 과정으로 시간표 조정 등을 충분히 논의해서 바꿔볼 필요도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하며 논쟁에 불을 지폈다.
논의가 당내 친문 진영을 중심으로 나왔다는 말이 전해지면서, 그 이면에 다른 셈법이 담겨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이재명 경기지사에 대한 견제 심리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이재명 지사는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 나온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다른 주자들을 제치고 독주체제를 굳히고 있다. 일요신문이 지령 1500호를 맞아 여론조사 전문업체 조원씨앤아이에 의뢰해 1월 31일부터 3일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이재명 지사는 28.5% 지지율을 기록, 이낙연 대표(14.6%)와 격차를 약 2배 차이로 벌렸다(조원씨앤아이의 자세한 조사개요와 결과는 여론조사업체 홈페이지 및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이러한 상황에서 경선을 빨리 할수록 이재명 지사에게 유리하다. 반면 이낙연 대표나 정세균 총리 등 민주당의 다른 경쟁 주자들로서는 경선을 늦추면 이 지사를 추격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이재명 지사 견제론에 대한 반론도 있다. 대선후보 경선 일정을 미루자는 제안은 지난해 8월 전당대회 과정에서도 한 차례 제기된 바 있기 때문. 이해찬 당시 대표가 “먼저 대선후보를 확정했을 때 본선에서 승리했다”며 당헌 유지를 고수하는 것으로 일단락이 났다. 이때는 당시 대선주자 선호도 1위였던 이낙연 대표에 대한 견제 심리가 발동한 것으로 해석됐었다.
이재명 지사 측에서도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재명 지사 측은 “일부 의원들이 사석에서 아이디어 차원에서 한 말로 알고 있다. 당의 공식적 의제로 나온 바 없다”며 “대선은 공당의 가장 큰 행사다. 전 국민들이 바라보고 있는데 특정인이나 특정 계파의 유불리를 따져 경선 일정을 연기할 수는 없을 거라고 본다”고 전했다.
‘친문 적자’로 분류되는 김경수 경남도지사의 ‘드루킹 사건’ 대법원 선고도 경선 연기 논의에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이 나온다. 민주당 내 뚜렷한 친문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김경수 지사의 대법원 판결과 대선 참여를 염두에 두고 시간을 벌려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 내에서도 김경수 지사의 차기 대선 참여는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우세한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 사정을 잘 아는 정치권 한 관계자는 “친문 핵심들 사이에서는 지난해 항소심 판결 전부터 ‘김경수 지사는 차기 대선주자로 힘들다’는 말이 나왔다. 경선을 미룬다고 해도 김경수 지사가 차기 대선 레이스에 들어가기는 어렵다”며 “집권여당이 한 사람의 후보가 돌아올 것을 기대해 일정을 조정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꼬집었다.
지난해 11월 드루킹 사건과 관련한 항소심에서 일부 유죄판결을 받고 서울고등법원 청사를 떠나고 있는 김경수 경남도지사. 사진=이종현 기자
논란이 커지자 민주당은 공식입장을 통해 “대선후보 경선 연기는 당내에서 논의된 바도, 검토된 바도 없다”고 선을 긋고 나섰다. 민주당 한 초선 의원은 “지난해 당헌을 개정하며 이미 한 차례 곤욕을 치렀는데, 당헌을 또 바꿀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앞서 민주당은 오는 4·7 재보궐 선거 서울·부산시장 후보를 내기 위해 지난해 11월 전당원 투표를 통해 당헌을 개정했다. 하지만 당시 전체 투표율은 26.35%를 기록, 3분의 1 이상이라는 당헌상 유효 투표에 미치지 못해 효력 논란이 일었다.
다만 당헌 개정 없이도 대선후보 경선 일정을 연기할 수는 있다. 앞서 언급한 당헌 88조에서 “상당한 사유가 있을 때는 당무위원회의 의결로 달리 정할 수 있다”고 단서조항을 달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 한 관계자는 “모든 절차는 당헌 당규에 정해져있어 임의대로 못 한다”며 “경선 관련한 사항은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이해당사자 간 협의를 통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합의에 이르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오히려 민주당에서는 내부 분열을 조장하려는 세력이 음모론을 내는 것이라고 의심했다. 친문그룹에 속하는 한 의원은 “내가 확인해본 바로는 경선 일정 연기 논의가 나온 적이 없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민주당 내부에서는 다 알고 있다”며 “그렇다면 누가 이런 프레임을 만들어 내겠느냐. 대선 경선을 앞두고 당 내분을 만들어내려는 발상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민주당 관계자는 “민주당 당원 게시판에 경선을 미루기 위해 당헌 개정 전당원 투표를 하자는 제안도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러한 게시물들의 작성자를 확인해보니 일부는 민주당원이 맞는지 의구심이 드는 이들도 있었다. 경선 연기 주장의 진위를 파악해볼 필요는 있다”고 귀띔했다.
민주당은 5월 전당대회를 통해 새로운 당대표 체제가 들어선다. 이를 계기로 경선 준비 논의가 본격화되면 시간표 조정 등 논의가 다시 제기될 가능성은 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