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김광현에 이어 양현종(사진)까지 미국으로 떠났다. 야구 국가대표팀 에이스 역할은 누가 맡을지 주목된다. 사진=이영미 기자
김 감독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 야구의 전승 금메달을 이끈 사령탑이다. 2019년 초 제2대 국가대표 전임감독으로 선임됐다. 지난해 8월로 예정됐던 도쿄올림픽까지 대표팀 지휘봉을 잡기로 했지만, 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으로 대회가 1년 연기됐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김 감독의 국가대표 사령탑 계약 종료를 앞둔 시점에 이사회를 열고 이견 없이 연임을 의결했다. ‘김경문호’의 여정은 그렇게 1년 더 연장됐다.
#올림픽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김경문 감독은 야구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이후 첫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과거 대표팀들보다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대표팀을 이끌고 2019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프리미어12에서 준우승해 올림픽 본선 출전권을 따냈다. 협회가 망설임 없이 김 감독에게 국가대표 감독직을 계속 맡긴 이유다. 다만 ‘진짜 목표’인 올림픽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대표팀 전력은 이전보다 더 약해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프리미어12에 출전한 야구 국가대표팀 28명은 이전 대표팀보다 전체적으로 연령이 낮았다. 과거 대표팀을 이끌었던 이대호(롯데 자이언츠), 김태균(은퇴), 오승환(삼성 라이온즈) 등 1982년생 선수들이 모두 떠났다. 당시 대표팀 최고령자는 1986년생인 박병호. 변화의 조짐이 뚜렷했다.
김경문 감독은 12년 전에도 주축 선수가 대거 바뀐 ‘젊은 국가대표팀’을 지휘해 좋은 성적을 낸 경험이 있다. 그러나 2008년 베이징에서도, 2019년 도쿄에서도 ‘인위적인 세대교체’를 염두에 둔 적은 없다. 김 감독은 프리미어12를 앞두고 “리그 성적과 대표팀 구성 등을 고려해 베스트 멤버를 뽑았을 뿐”이라고 못 박았다.
실제로 프리미어12 대표팀에선 30대 중후반 선수의 이탈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을 뿐, 20대 초중반 선수가 많아졌다고 보긴 어렵다. 대표팀 주축은 차우찬(LG 트윈스), 양의지(NC 다이노스), 최정(SK 와이번스), 김현수(LG), 양현종(당시 KIA 타이거즈), 김광현(당시 SK) 등 30대 초반 선수가 많았다. 투수진 평균 연령(26.9세)이 조금 낮아졌지만, 야수들은 대부분 한 번이라도 대표팀을 거친 선수들로 구성됐다. 성인 대표팀이 처음인 야수는 포수 박세혁과 외야수 강백호가 전부였다.
투수들의 평균 연령이 낮아진 데도 이유가 있다. 그때 프리미어12 대표팀의 가장 큰 고민은 선발 투수였다. 김경문 감독이 고민 없이 발탁한 원투펀치는 양현종과 김광현. 1988년생 동갑내기인 이들은 경험, 기량, 의지, 열정 면에서 어느 하나 빠지는 부분 없이 완벽한 조합이었다.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 둘은 늘 대표팀 1, 2선발을 다툰 최고 투수였다. 그러나 조별리그 3경기와 슈퍼라운드 4경기, 올림픽 출전권을 위해 반드시 진출해야 하는 준결승과 결승 등을 모두 치르려면 최소 4명의 선발 투수가 필요했다. 둘 다 왼손인 양현종, 김광현에 비해 다른 오른손 선발 투수들의 국가대표 경험이 너무 부족해 보였다.
김경문 감독은 고심 끝에 남미 팀에 강한 언더핸드 박종훈(SK)과 2019년 팀의 주축 선발 투수로 발돋움한 이영하(두산 베어스), 이승호(키움 히어로즈)에게 중책을 맡겼다. 동시에 하재훈(SK), 고우석(LG), 조상우(키움) 등 강속구를 던지는 각 팀 소방수들을 선발해 불펜의 양과 질을 높였다. 일본전처럼 전력을 쏟아야 하는 경기에선 양현종이나 김광현 같은 에이스가 5~6이닝을 책임진 뒤 강속구 마무리 투수들이 1이닝씩 이어 던져 상대 타선을 봉쇄하는 게 최고의 전략이다. 또 강한 불펜 투수가 많으면 선발 투수가 조기 강판한 경기에서도 뒷심을 발휘할 수 있는 계산이 선다.
NC 구창모는 기존 국가대표 에이스들의 공백을 메울 적임자로 첫 손에 꼽힌다. 사진=연합뉴스
#구창모, 김광현-양현종 뒤 이을까
그러나 도쿄올림픽에서는 2년 전의 마운드 구상마저 흐트러질 가능성이 커졌다. 김광현이 지난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데 이어 양현종까지 올해 텍사스 구단 스프링캠프에 초청 선수로 참가한다. 오랜 기간 소속팀과 야구 대표팀에서 맹활약한 선수들이 더 큰 무대에 도전장을 던졌다. 메이저리그는 원칙적으로 올림픽에 소속 선수를 차출하지 않는다. 김광현은 올해도 이변이 없는 한 빅리그에서 뛸 것이 유력하고, 양현종 역시 마이너리그에 머물지 않는 한 도쿄올림픽 국가대표로 뛸 수 없다.
2013년 류현진이 떠난 뒤 한 차례 전력 약화를 감수해야 했던 한국 야구대표팀은 이제 부동의 왼손 원투펀치마저 없이 새 판을 짜야 하는 상황.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김경문 감독은 “앞으로 선수들을 더 열심히 관찰해야 할 것 같다. 13년 전 베이징 올림픽 때처럼, 결국 (의도와 별개로) 전면적 세대교체로 가닥이 잡힐 것 같다”고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물론 아직 코로나19 여파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올해 역시 도쿄올림픽 개최 여부가 불투명하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 무산 시 큰 경제적 타격을 입는 일본은 개최 여부 결정과 코로나19 대응 방안 확정을 최대한 뒤로 미룰 수밖에 없다. 김 감독 역시 “언제 최종 결정이 나올지 모르니 나 역시 ‘무조건 올림픽이 열린다’는 가정 아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류현진, 김광현, 양현종의 빈자리를 채울 1순위 대체자는 지난해 NC 토종 에이스로 부상한 구창모(24)다. 그는 지난해 9승 무패 평균자책점 1.74로 압도적인 투구를 펼쳤다. 7월 말 팔꿈치 부상으로 이탈해 10월 말 복귀한 게 옥에 티. 3개월 정도 휴식하지 않았다면, 외국인 투수들의 이름으로 가득한 지난 시즌 투수 개인 타이틀 여러 부문에서 최고의 자리를 다툴 수도 있었다. 기대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때마침 구창모는 김경문 감독이 NC 사령탑을 맡았을 때부터 눈여겨보던 투수다. 김 감독은 재임 당시 구창모에게 꾸준히 선발 등판 기회를 줬다. 그는 2019년 마침내 데뷔 첫 두 자릿수 승수(10승)를 올린 뒤 지난해 잠재력을 터트렸다.
올해 역시 지난 시즌 못지않은 활약을 펼친다면, 단연 구창모가 가장 유력한 대표팀 에이스 후보다. 지난해 다쳤던 팔꿈치 관리를 위해 올해 스프링캠프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좀 더 완벽한 재활을 위한 포석일 뿐이다. 그는 “많은 분의 관심과 기대를 잘 알고 있다. 그에 걸맞게 잘 준비하고 좋은 성적을 내서 좋은 선배님들의 좌완 계보를 잇고 싶다”며 “국가대표는 항상 꿈꾸던 자리다. 저를 키워주신 김경문 감독님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으셔서 더 뛰고 싶다”고 의욕을 보이고 있다.
#소형준, 국대 오른손 에이스 갈증 풀까
지난해 신인왕 소형준(KT 위즈)은 그동안 국가대표팀이 늘 목말라 하던 ‘오른손 에이스’ 후보라 더 귀하다. 그는 데뷔 첫 시즌인 지난해 개막과 동시에 선발 로테이션 한 자리를 꿰찼다. 첫 시즌부터 26경기에 등판해 13승(6패)을 올렸다. 박종훈과 함께 지난 시즌 국내 투수 최다승이다. 고졸 신인으로는 역대 아홉 번째이자 2006년 류현진(당시 한화) 이후 14년 만에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평균자책점도 3.86으로 준수하다. 프로 한 시즌 만에 ‘유망주’ 꼬리표를 떼고 KBO리그 정상급 선발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역사적인 KT의 가을 야구 첫 경기 선발도 소형준이었다. 플레이오프(PO) 1차전 마운드에 올라 ‘가을의 골리앗’ 두산 타선을 6⅔이닝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KT가 2-3으로 패했지만, 스포트라이트는 두산이 아닌 소형준에게 쏟아졌다. 이강철 KT 감독은 경기 후 패장 인터뷰에서 “더는 칭찬할 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모처럼 국가대표급 투수가 나온 것 같다. 내가 선수였을 때보다 훨씬 잘했다”고 흐뭇해했다.
적장인 김태형 두산 감독조차 “웬만해선 신인 투수를 포스트시즌 첫 경기에 낼 수 없다. 그런데 소형준을 보니, 이강철 감독이 1차전 선발로 쓴 이유를 알겠더라”고 감탄했다. 소형준이 ‘올해의 신인’을 넘어 차세대 국가대표 에이스로 발돋움할 만큼 성장했다는 얘기다.
소형준은 고교 시절부터 묵직한 구위와 노련한 투구를 앞세워 청소년 대표팀 에이스로 활약했다. 대학생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에도 고교생 4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발됐다. 이 대회 에이스 역할 역시 대학생이 아닌 소형준의 몫이었다. 소형준이 올 시즌 국가대표급 투수로 성장한다면, 오랜 기간 오른손 에이스 부재로 고심한 한국 야구에는 더 큰 경쟁력이 생긴다.
#김진욱·장재영에 거는 기대
또 다른 희망의 싹도 있다. 올해 롯데에 입단하는 왼손 투수 김진욱과 키움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하는 오른손 투수 장재영이다. 둘은 고교 시절부터 이미 ‘초고교급’ 투수로 프로야구 팬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장재영은 장정석 전 키움 감독의 아들이다. 무려 9억 원의 계약금을 받았다. 2006년 한기주(당시 KIA)의 10억 원에 이어 역대 신인 계약금 2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를 향한 팀 안팎의 기대를 짐작케 한다.
장재영은 덕수고 1학년 때 이미 시속 150km 안팎의 강속구를 던져 전국적인 화제를 모았다. 3년 가까이 흐른 지금은 구속이 더 늘었다. 지난해 최고 구속이 시속 157km(비공식)에 달한다는 후문이다. 키 188cm에 몸무게 92kg으로 체격 조건도 무척 좋다. 프로에서 체계적으로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면 시속 160km 도전도 가능하다는 예상이 나올 정도다. 그는 고교 시절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KBO리그에 먼저 도전장을 던지기로 했다. 강속구로 한국 타자들을 압도했던 일본 투수들처럼, 장재영 역시 힘으로 상대의 기를 꺾을 수 있는 국가대표 꿈나무다.
김진욱은 올해 신인 2차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롯데 지명을 받았다. 중학교 시절 전학 이력 탓에 1차 지명 대상자에서 제외됐고, 그 덕에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진 롯데가 강릉고 출신 김진욱을 지명하는 행운을 잡았다. 강속구 투수는 아니지만 제구력과 경기 운영 능력이 웬만한 프로 선수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로 스카우트들이 입을 모아 “고교 선수로는 이미 완성형에 가깝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다.
고교 2학년이던 2019년엔 3학년들을 제치고 ‘고교 최동원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고교 무대 10경기 평균자책점이 1.70이다. 올해 프로에 첫 선을 보일 김진욱 역시 김경문 감독이 ‘매의 눈’으로 살펴볼 후보 중 하나다. 이제 갓 20대가 되는 이들이 태극마크를 달게 된다면, 한국 야구도 ‘10년 원투펀치’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물론 앞서 언급된 투수들 외에도 예기치 못한 ‘다크호스’가 나타나 대표팀 마운드의 고민을 해결해준다면 금상첨화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