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뿐 아니라, 검찰에서도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대목이다. 특히 검찰의 경우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건 처리 과정을 놓고 부장검사급 이상 간부들끼리의 의견도 서로 다른 경우들이 있어 ‘녹취 폭로’를 통한 내부 고발은 더 잇따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법조계에서 녹취는 수사에 증거 자료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법적으로 당사자 간 나눈 대화는 몰래 녹취하더라도 불법이 아니다. 사진은 녹취록 이미지 사진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무관하다. 사진=임준선 기자
법조계에서 녹취는 수사에 증거 자료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법적으로 당사자 간 나눈 대화는 몰래 녹취하더라도 불법이 아니다. 동의를 받을 경우에는 증거로 활용도 가능하다. 때문에 경찰은 조사를 받기 꺼려하는 참고인과 전화 통화를 한 뒤 이를 녹취하겠다고 고지해 ‘녹취록’을 증거로 쓰기 시작했다. 검찰 역시 면회실에서 피의자와 나눈 대화를 녹음한 뒤 증거로 활용했다. 그렇게 녹취는 서서히 법조계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법조계 당사자를 충격에 빠지게 한 녹취의 시작은 기자들이었다. 주요 취재원과의 대화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 시작된 방법이었는데, 스마트폰 등장과 함께 본격화됐다.
대표적인 사건이 한동훈 검사장과 채널A 이동재 전 기자 간 검언유착 의혹 사건이다. 지난해 2월 13일 한동훈 당시 부산고검 차장검사(검사장) 사무실을 방문한 이동재 채널A 전 기자는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의 검찰 개혁 등에 대해 나눈 대화를 녹취했다. 당시 한 검사장은 이 전 기자 측이 녹취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으나, 추후 논란이 불거지면서 녹취 파일 존재 여부가 알려졌다. 이 전 기자 측은 녹취 파일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검언유착 의혹이 불거지자 ‘공모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자료를 공개했다. 당시에도 검찰 안팎에서는 ‘어떻게 검사와의 대화를 녹취할 수 있냐’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이보다 앞선 2017년에는 법원 내에서 판사들끼리의 전화 녹취를 하는 일이 있었다. 최근 임성근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을 주도한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7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근무하던 당시,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과의 통화를 몰래 녹취했다. 그는 임 전 차장의 “조용하게 가면 좋다”라는 등 블랙리스트 의혹 관련 발언 녹음파일을 대법원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1차 진상조사위원회에 사법농단 증거자료로 제출했다.
그리고 3년여가 지난 2월 4일 임성근 부장판사 측에서 몰래 녹취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임 부장판사가 김명수 대법원장과 ‘사의 표명’을 하면서 나눈 대화 사실이 공개됐다. 처음에는 조선일보 보도로 김 대법원장이 임 부장판사의 사표 제출을 ‘정치적 이유로 거절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김 대법원장은 “임 부장판사로부터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받은 적이 없다. 정치적인 이유로 거절한 적도 없다”고 맞섰다. 이에 임 부장판사 측이 작심하고 녹취파일을 공개했고 김 대법원장은 ‘거짓말쟁이’로 전락했다.
법원 내에서 ‘적절했냐’ 여부를 놓고 많은 고민들이 오가는 대목이다. 임 부장판사는 처음에는 해당 녹음파일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도 “보도를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언론에 피력했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이 이를 부인하면서 사건이 진실 공방으로 흘러가자 불가피하게 녹음을 공개했다고 설명했다.
임성근 부장판사 탄핵을 주도한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사진)이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근무하던 2017년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과의 통화를 몰래 녹취했다. 사진=박은숙 기자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얼마나 절박했으면 녹취를 해서 ‘증거를 확보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겠냐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임 부장판사가 대법원장과의 대화를 녹취할 생각을 하고 시도를 했다는 것을 상상하면 ‘그렇게 하는 게 최선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며 “녹취가 아무리 재판에서 증거로 활용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하지만 법원 내에서 녹취가 이뤄져야 할 만큼 서로 불신하는 현실이 됐다는 게 안타깝고 녹취 파일을 공개하지 않으면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판사가 있다는 사실도 씁쓸하다”고 토로했다.
#검찰도 늘어난 고민
논란에 대해 법조 경력이 20년이 넘는 판·검사들은 ‘녹취가 공공연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반응이다. 특히 ‘상하 구조’가 확실한 검찰의 충격이 더 크다.
검사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임성근 부장판사는 법원이나 검찰에서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고위법관이자 엘리트였는데 그런 판사가 녹취까지 했다는 사실에 놀랐다”며 “수사를 위해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하는 검찰 같은 조직에서 녹취로 인한 폭로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서로를 믿고 일을 하겠냐”고 말했다.
특히 검찰의 경우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수사 방향이나 결정이 바뀌기 때문에 자기 방어를 위한 녹취가 실제 이뤄지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도 있다. 검찰청에 근무하는 한 직원은 “수사 관련 다소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지시 등이 내려올 경우 이에 대해 내 입장을 설명해 줄 증거들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고 느낀 적이 있다”며 “동료들끼리, 가끔 비상식적인 발언을 하는 상사들에 대해서는 ‘확 녹취를 해서 폭로해야 한다’는 얘기를 한 적도 있다. 누군가는 문제가 될 법한 상황을 입증하기 위해 녹취를 하고 있지 않겠냐”고 털어놨다. 그만큼, 녹취가 ‘나를 보호하는 방법’이 되어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자연스레 간부급 검사들은 더욱 말을 조심하게 됐다. 간부급 검사는 “전에도 방에서 팀원의 보고를 받을 때, 다소 입장이 다를 경우 일부러 방문을 열어두고 밖에서도 들릴 수 있도록 하곤 했다”며 “서로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조직이 됐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지만, 2030 젊은 직원들을 중심으로 생긴 자신을 방어하는 수단이 녹취 아니냐. 어찌 보면 스마트폰 발전과 함께 생긴 새로운 조직생활 생존법 같다”고 평가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