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월 3일 개봉을 앞둔 영화 ‘미나리’에서 한예리는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1세대 가족 속 어머니 ‘모니카’ 역을 맡았다. 사진=판씨네마 제공
“국내 관객들을 만나기 이전에 큰 이슈가 되면서 어떤 분들은 ‘어, 봤는데 왜 이렇게 심심해’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 영화를 ‘기생충’ 같은 영화와 비슷한 영화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까봐 걱정되기도 하고요. 기대를 너무 많이 갖고 있는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 긴장하고 있기도 해요(웃음). 다만 이 영화 속 이야기가 한국에서 많이 들려지고 또 보였던 이야기들이어서 어떤 분들은 ‘이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얘긴데’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또 이민 사회에서는 더 크게 공감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많이 사랑해주신 것도 있고요.”
극 중 한예리는 1980년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 정착한 한인 1세대 ‘모니카’ 역을 맡았다. 발을 딛고 있는 땅만 바뀌었을 뿐, 가정의 안팎을 책임지는 어머니라는 점에 있어서 모니카는 미국 아칸소 주라는 배경 속에서도 우리가 잘 아는 ‘한국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기댈 곳 없는 타지에 기어코 뿌리를 내리려는 남편 제이콥(스티븐 연 분)의 꿈을 지지하고 또 함께하려 하지만 경제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면서 수없이 갈등한다. 그럼에도 아이들과 가족을 위해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모니카의 모습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어머니의 모습 그 자체였다.
“제 생각에도 한국의 정서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모니카였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모니카가 그런 스테레오 타입이어야만 공감대를 형성해서 좀 더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죠. 저는 모니카가 표현해 낸 모성애가 희생이 아닐까 생각해요. 모니카와 제이콥 부부가 본인들의 꿈도 있겠지만 아이들을 잘 기르고, 교육이 주는 힘을 알고 있기에 더 많은 선택들을 아이들이 할 수 있도록 미국 땅을 찾은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두 사람의 희생이 컸고, 그게 모성애 또는 부성애와 연결되지 않았나 싶어요.”
아이작 정 감독은 모니카 역을 두고 “한예리가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판씨네마 제공
“감독님이 제 어떤 모습을 보고서 이렇게 생각하셨는지 저도 정말 모르겠어요. 그냥 첫 미팅 끝나고 나서 감독님이 저를 소개해주신 분과 그런 대화를 나눴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냥 걸어 들어오는데, 모니카가 들어오는 줄 알았어’라고(웃음). 뭘까요, 몸에서 나오는 그런 에너지가 있어서였을까요? 아니면 얼굴 때문일까요(웃음)? 저희 배우들이 얼굴이 다 닮았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뭘 믿고 저를 이렇게 캐스팅 해주셨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만나면 꼭 물어볼래요(웃음).”
감독의 혜안대로 한예리가 연기한 모니카는 ‘한예리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완성됐다. 배우가 캐릭터를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하면 관객도 공감시킬 수 없다는 믿음에서, 한예리는 모니카와 그가 처한 상황과 그의 가족들을 먼저 이해해야 했다. ‘미나리’에서 등장한 “아이고”라는 대사도 그런 이해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남편을 따라 이역만리로 떠난 뒤, 이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 엄마 순자(윤여정 분)를 보게 되자마자 외친 한 마디였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반가움처럼 복받치는 감정과 헤어진 동안에 쌓아왔던,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이처럼 완벽하게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말이 또 있을까.
“그 순간 순자와 모니카가 굉장히 친밀한 관계이고 이들이 거의 같은 사람이라는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엄마와 생이별을 하듯이 떨어져서 미국이란 낯선 땅에 딸이 가 버렸고, 다시는 못 만날 거란 생각을 둘이 하고 있다가 모니카가 갔던 길을 순자가 오게 된 거잖아요. 그 순간순간들이 어땠을까. 그 많은 짐들을 딸을 주겠다고 이고지고 집에서 제일 좋은 옷을 갖춰 입고 온 엄마를 처음 본 순간,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고 가장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 너무 기뻤을 거예요. 그래서 한국적 추임새를 넣으면 좋을 것 같더라고요. ‘아이고’는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쓰는 말이잖아요? 그런 말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아이고’가 나왔어요.”
극 중 모니카가 순자(윤여정 분)을 향해 외치는 “아이고”는 한예리의 아이디어였다. 사진=영화 ‘미나리’ 스틸컷
그러면서 한예리는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영화평 가운데 한국계 캐나다인 배우인 샌드라 오의 이야기를 꼽았다.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의 크리스티나 양 역으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그는 미국과 영국의 영화 및 드라마에 모두 주연으로 출연한 최초의 동양인 배우이기도 하다. 이민 2세대로 알려진 샌드라 오는 앞서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을 축하하며 “한국계로서 자랑스럽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샌드라 오 배우가 ‘이 영화를 보는 게 쉽지 않았다’고 얘기해주신 걸 들었어요. 편하게 볼 수 없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영화가 자신의 어렸을 때 현실적으로 자신이 감내해야 했고 겪어야 했던 걸 다시 맞닥뜨리게 해서 그 상처를 건드릴까봐 주저했다고. 그러면서도 이 영화로 인해 좀 더 힐링을 하게 됐고 많은 부분 치유를 받았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 말을 듣고 너무 좋더라고요. 제가 겪어보진 못했지만 그들에겐 많은 삶의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불안감을 항상 가지고 살아가야 했을 거예요. 거기다 부모님과 이민 2세대는 또 다른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마치 외딴 섬처럼, 한국인도 미국인도 되지 못하는 어중간한 섬에 위치해 있는 그런 마음들을 이 영화가 잘 보듬어주는 것 같아서 참 감독님께도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그리고 용기를 내서 이 영화를 봐 준 샌드라, 용기를 내서 촬영을 한 스티븐에게도 감사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