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기현 감독은 K리그 지도자로 데뷔한 지난 시즌, K리그2 플레이오프에 오르며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경기장 밖 선수들의 생활면에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식사시간을 따로 정해두지 않고 웨이트트레이닝을 선수 자율에 맡기는 등 ‘유럽식’ 운영으로 이목을 끌었다. 선수단 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선수들이 개별적으로 홈경기에 출퇴근하는 모습도 경남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
색다른 모습으로 프로 무대에 첫발을 내디딘 ‘감독 설기현’은 지난해 부침을 겪었다. 신선한 모습을 보였지만 시즌 초반 본인도 ‘과도기를 겪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시즌 말미에 들어 경기력이 살아나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과도기를 겪은 것은 맞다. 선수들도 나도 고생을 많이 했다(웃음). 오랫동안 축구를 했고 대학무대에서 감독으로 경험을 쌓았지만 지난 1년 동안에도 축구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많은 것을 배운 한 해였다. 이번 시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지난 시즌 경남의 최종 리그 순위는 3위였다. 준플레이오프를 거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1승만 더 거두면 1부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 관문을 넘지 못했다. 설 감독은 “결국은 우리가 부족했던 것이다. 결과를 인정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면서 “다만 경기력만큼은 정말 좋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시즌을 준비하면서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설사커’라는 별명이 이제는 친근해졌다. 그는 “처음엔 달갑지 않았다. 뭔가 지저분한 어감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웃음). ‘내가 정말 별명이 생길 만큼 일부러라도 특별한 축구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큼 관심을 받고 있다는 뜻으로 생각한다. 꺼려지던 어감도 이제는 괜찮다”고 전했다. “이제는 좋아하는 별명이다”라며 웃었다.
설기현 감독은 경기장 안팎에서 자신만의 지도 방식을 도입해 호평을 받고 있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K리그1 승격 기회를 눈앞에서 놓쳤지만 아쉬워할 수만은 없었다. 설기현 감독과 경남은 2021시즌을 발 빠르게 준비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얼어붙은 이적 시장에서 경남은 가장 알찬 보강을 한 구단 중 하나다. 무엇보다 ‘최대어’로 평가받던 국가대표 공격수 이정협 영입 경쟁에서 승리한 것이 눈에 띈다.
설 감독은 “지난 시즌 스트라이커 자원이 부족해 고생해서 신경을 많이 썼다. 리그에 전체적으로 스트라이커가 부족한데 이정협이 나올 수 있다는 애기를 들었고 적극적으로 제안을 했다”며 “우리 팀이 어떤 팀이고 이정협에게 어떤 역할을 맡길지 자세히 설명해줬다. 고맙게도 결국 우리 팀을 선택해줬다”고 말했다.
설기현 감독은 짧은 기간 대표팀 코치를 맡던 시절 이정협과 함께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가까이서 지켜본 이정협은 생각과 달랐다. 그는 “대표팀 시절엔 훈련 때 마주치고 간단한 대화만 했다. 길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이번에 영입 때문에 만나서 깜짝 놀랐다”며 “너무 순진하더라. 순수함을 넘어 순진한 선수다. 대표팀 생활을 오래한 선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스타 의식이 없었다. 그런 부분이 우리 팀과 잘 맞는다. 기대가 많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정협 외에도 새로 영입한 선수들을 자랑했다. “윌리안과 에르난데스, 외국인 선수들은 측면에서 돌파력이 뛰어난 선수다. 볼 키핑과 패스 능력이 좋은 임민혁도 있다. 윤주태는 기량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다(웃음). 수비진에도 김영찬, 김동진 등이 새로 왔다. 좋은 선수단을 꾸릴 수 있게 도와준 구단에 고맙다”면서도 “우리 팀 이적 시장 기조는 팀을 바꾸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 시즌 말미에 경기력이 좋았기에 1년 공들인 결실을 맺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최대한 기존 선수들을 지켰고 영입된 선수들로 더블 스쿼드를 구축하려고 했다. 기존 선수들과 영입된 선수들 사이 경쟁 체제가 시작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설기현 감독의 축구, 일명 ‘설사커’의 특징 중 하나는 후방에서부터 빌드업이다. 상대의 전방 압박이 강하게 들어오는 상황에서도 수비진과 골키퍼는 짧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공격을 풀어나간다. 다만 이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하며 실점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 시즌 후반기에 접어들며 빌드업이 안정을 찾았고 골키퍼 손정현은 “발 밑 기술이 좋아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음은 설 감독의 설명.
“손정현뿐 아니라 우리 수비수들이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면서 나 또한 어려움을 겪었다(웃음). 경기력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감독 욕심은 끝이 없다. 최근엔 짧은 패스만 하는 것을 자제시키고 있다. 빌드업에만 집착하다보면 실수가 나올 수 있다. 수비진에서 길게 걷어낸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공을 멀리 차내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연구하고 있다. 미숙한 부분은 분명 이번 시즌 보완이 될 것이다.”
설사커 특유의 빌드업이 주목을 받았지만 설기현 감독은 “내 축구의 포인트가 빌드업에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면서 “요즘은 손정현 골키퍼를 비롯해 수비진에 빌드업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제발 단순하게 하라’고 주문한다(웃음). 그래도 본인들이 후방에서 매끄럽게 풀어나가는 것에 욕심을 내고 있다. 어느 정도 적정선을 찾아가는 중이다”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빌드업을 포함해 설기현 감독이 구상하는 축구는 어떤 모습일까.
“결국은 조직적인 협력 플레이를 바탕으로 하는 축구를 만들어내고 싶다. 물론 선수 개인의 역량은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협력으로 상대 수비를 풀어내고 그 다음 공간이나 여유가 생기면 개인 기술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 선수 시절 영국에서 뛸 때 약팀을 상대로는 괜찮았지만 세계적 수준으로 평가받는 선수들을 상대로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마다 동료들이 협력 플레이로 서로 도와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많았다. 그런 부분은 선수들이 스스로 하기 어렵다. 감독이 잡아줘야 하는 부분이다. 그때부터 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감독이 되면 조직적으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전술을 펼쳐보고 싶었다.”
축구인들은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지도자로 변신하면 종종 자신만의 ‘롤모델’을 밝힌다. 선수 시절 자신을 지도했던 감독들의 이름을 거론하기도 한다. 설기현 감독도 영감을 받은 인물이 있을까. 그는 “그렇게 20대 후반부터 조직적인 축구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이전까지는 감독이 시키는 대로 축구를 하던 선수였다”며 “그러다 어떤 한 감독님이 조직적으로 팀을 만드는 모습을 발견했다. 훈련 과정에서부터 협력적 플레이를 준비했고 경기장 위에서 그런 모습이 구현됐다. 나중에 내가 감독이 된다면 일부는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해외 생활 중에 만난 감독님인데 누군지 밝히지는 않겠다”며 웃었다.
설기현 감독은 자신의 축구에 대해 “조직적이고 협력적 플레이를 펼치는 전술을 구사하고 싶다”고 밝혔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감독으로 경험이 쌓이고 축구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변해온 만큼 팬들이 설기현 감독을 생각하는 이미지도 달라졌다. 선수 시절 설 감독은 무뚝뚝한 사람으로 간주됐다. 인터뷰 등에서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하며 ‘달변’으로 평가받긴 했지만 표정 변화가 많지 않고 경기장 위에서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선수였다.
하지만 감독 부임 이후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각종 매체에 자주 얼굴을 드러내며 부드러운 모습도 선보였다. 최근 대표팀 후배 조원희가 운영 중인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아픈 질문도 유쾌하게 대처해 나갔다. 그는 “사실은 선수 시절 무뚝뚝하던 면이 원래 내 모습이다(웃음)”라며 “선수 시절에는 경기장 위에서만 최선을 다하면 됐는데 감독은 그렇지 않더라. 전체적으로 팀을 이끌어야 하고 솔선수범하는 모습도 필요하다. 감독이 되니 많이 달라졌다. 유튜브에선 조원희가 워낙 재밌게 잘 이끌어줬다. 그런 친구가 아니었는데 선수 때와는 많이 다르더라”라고 전했다.
2021시즌 ‘설사커’도 약간의 변화가 있을 전망이다. 지난해는 설기현 감독의 프로 감독 데뷔 시즌이었다. 1년 만에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강팀으로 만들었기에 이제는 경쟁팀들의 견제가 예상된다. 그는 “당연히 지난 시즌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준비해야 하는 부분이다. 전술적 다양성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다”면서 “전력이 노출되고 분석이 된 상태에서도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 기존 전술의 완성도를 높여야 하고 새로운 옵션도 만들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K리그2는 이번 시즌에도 치열한 경쟁을 보일 전망이다. 제주 유나이티드, 수원 FC가 K리그1로 떠났지만 김천 상무, 부산 아이파크가 합류했다. 설기현 감독은 “김천이 가장 위협적인 팀이라고 본다. 워낙 멤버가 좋고 지난 시즌 1부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지 않았나. 대전도 이민성 감독님이 새로 오시면서 팀이 많이 보완됐을 것이라고 본다. 서울 이랜드, 전남 역시 상대하기 껄끄러운 팀이다”라며 “지난 시즌 제주나 수원은 이런 경쟁자들을 상대로 승리하며 승격을 이뤄냈다. 우리도 껄끄러운 팀들을 상대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로 2년차를 맞은 설기현 감독은 인터뷰 내내 ‘승격’이라는 목표를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설기현 감독은 “지난 시즌 아쉽게 승격에 실패했다. 부족한 점을 잘 보완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도전인 만큼 반드시 승격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플레이오프는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너무 힘들더라. 두 번은 못하겠다(웃음). 1위에 올라서 곧장 1부리그로 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