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은 2월 25일 국회 정보위원회 비공개회의에서 “(사찰 의혹을) 국정원을 선거 개입 등 정치영역으로 다시 끌어들이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했다. 사진=국회사진취재단
이명박 정부 국정원이 연예인, 민간인 등을 대상으로 사찰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건 1월 20일 국정원이 시민단체 ‘내놔라 내파일 시민행동’의 정보 공개 청구에 대해 청구인 12인에 관한 사찰 관련 문건 63건을 공개하면서다. ‘내놔라 내파일’은 2017년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 때 국정원 사찰 정황이 드러나자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명진 스님 등 916명이 사찰 문건 정보 공개 청구를 위해 만든 시민단체다.
이후 국정원 내부 직원은 2월 8일 SBS 인터뷰에서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이 18대 국회의원 299명 전원을 사찰했다고 폭로했다. 사찰 내용엔 개인적인 치부나 탈세 여부, 자금 내역 등이 포함됐다고 전했다. 이에 당시 사찰당했다고 의심하는 일부 국회의원이나 현 여권 인사들이 개인적으로 정보 공개 청구에 나서면서 논란은 커졌다.
#민주당 선공에 국민의힘 맞불
더불어민주당은 총공세에 나섰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2월 15일 민주당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반드시 진상을 밝혀야겠다. 오래 전 일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덮어놓고 갈 수 없는 중대범죄”라고 했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도 같은 날 “민주당은 국회 정보위원회 의결을 통한 불법사찰 자료 열람 등 국회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진상을 반드시 밝혀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월 15일 민주당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이명박 정부 사찰 의혹에 대해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반드시 진상을 밝혀야 한다”라고 말했다. 사진=국회사진취재단
국회 정보위 여당 간사 김병기 민주당 의원은 2월 16일 ‘국가정보기관의 사찰성 정보 공개 촉구 및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 결의안’을 대표 발의했다. 결의안에는 이낙연 대표와 김태년 원내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를 비롯해 범여권 국회의원 52명이 이름을 올렸다.
민주당에서는 박근혜 정부 때도 불법 사찰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민주당 소속 김경협 국회 정보위원장은 2월 23일 기자간담회에서 “국정원 불법 사찰은 박근혜 정부까지 계속됐고 비정상적 수집 문건 수는 약 20만 건에 이른다고 추정한다”고 밝혔다.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 대표도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에 불법 사찰 정보를 보고받았을 거라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국민의힘은 김대중 정부 때의 불법 사찰 사건을 거론하며 역공에 나서는 한편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여당의 정치적 공세라며 반발했다. 박민식 국민의힘 부산시장 예비후보는 2월 18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대중 정부 때 역대 국가정보원 사상 가장 조직적으로 불법도청이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박민식 예비후보는 2005년 불거진 ‘김대중(DJ) 정부 국정원 도청 사건’의 주임검사였다.
박민식 국민의힘 부산시장 예비후보가 2월 18일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에서 김대중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의 불법도청 내용을 공개하고 있다. 사진=국회사진취재단
박 후보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 국정원은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고위공직자, 시민단체 간부 등 1800여 명의 통화를 도청했다. 박 후보는 “국정원은 김대중 정부 시절 불법도청사건 실상을 국민에게 낱낱이 공개하고 정치공작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정보위 국민의힘 간사인 하태경 의원 또한 같은 날 “이명박 정부 때는 국정원 사찰이 있었고, 박근혜 정부 때는 개연성이 높았다면서, 김대중 정부 때는 없었고 노무현 정부 때는 개인적 일탈에 불과해 사찰 책임이 없다고 한다. 이는 실상과 다른 것으로 그 자체가 정치공작”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하 의원은 2월 24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포함한 사찰 항목별 문건 일괄 공개와, 악성 사찰 우선 공개를 원칙으로 국정원에 정보공개를 청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찰 의혹’ 카드 부메랑 될까
이번 논란이 여야 어디에 유리하게 작용할지는 알 수 없다. 사찰 의혹 카드를 먼저 꺼낸 여권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도 점쳐진다. 사찰과 관련해 역대 어느 정권도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국정원은 야당 정치인과 민간인 등을 대상으로 불법 도청했다. 2002년 10월 당시 정형근 한나라당 국회의원 폭로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만 해도 대선을 앞둔 정치적 공세로 여겨졌지만 수사 결과 불법 도청은 사실로 밝혀졌다.
김영삼·김대중 정부도 사찰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00년 6월 19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청해 방북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재판 끝에 2007년 12월 20일 김대중 정부 당시 국정원장을 지냈던 임동원, 신건 전직 국정원장은 ‘불법 도청’을 지시·묵인한 혐의(통신비밀보호법 위반)로 기소돼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두 전직 국정원장은 상고를 제기했으나 같은 해 12월 27일 취하했다. 형이 확정됐지만 이 둘은 나흘 뒤인 12월 31일 대통령 특별사면 대상자에 올랐다. 현재 박지원 국정원장은 김대중 정권 때 공보수석, 문화광관부 장관을 거쳐 비서실장을 지낸 경력 탓에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는 공세를 받고 있다.
최초 문민정부 김영삼 정부 때엔 기업인, 정치인 등을 대상으로 불법 도·감청을 전담한 ‘미림팀’이 운영되기도 했다. 1994년 만들어져 1998년까지 운영된 미림팀의 존재는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직원이었던 김기삼 씨가 2005년 7월 폭로하면서 드러났다.
당시 미림팀이 도청한 내용 가운데 삼성그룹이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을 통해 1997년 대선에서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게 약 100억 원의 대선자금을 제공했다는 내용 등이 있었다. 이는 ‘삼성 X파일’로 불리며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미림팀은 ‘문민정부 황태자’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씨의 사조직처럼 운영됐다는 증언도 있었지만 검찰 조사에서 직접적인 관련성이 밝혀지진 않았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사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정권은 없을 것”이라며 “의혹이 불거진 이상 모든 정권의 사찰 문서를 공개할 필요가 있다. 사찰은 중대한 범죄”라고 지적했다. 이어 신 교수는 “민주당이 정치적 공세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공개 시기는 재보궐 선거 이후가 적당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이 정도 사안은 선거를 앞두고 펼쳐진 기획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며 “정무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여권 인사로 생각해야 한다. 양정철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 평론가는 “박지원 원장은 현 상황이 곤란할 것”이라며 “공개를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사찰 내용 가운데 국가 기밀이 있을 수도 있다. 그 이유로 선별적으로 공개할 가능성이 크다. 그럴 경우 또 다른 논란을 야기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