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계 법무부 장관 발언이다. 이 발언은 문재인 대통령이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 설치와 관련해 속도 조절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됐다. 발언 이틀 후인 2월 24일 박 장관은 “대통령께서도 그렇고 저도 속도조절이라는 표현을 쓴 적 없다”며 선을 그었다. 그런데 같은 날 국회에 출석한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은 “박 장관이 임명장을 받으러 온 날 대통령께서 속도조절 당부를 했다”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
박범계 장관과 유영민 비서실장 발언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발언 모두 처음에는 대통령이 속도조절을 요구했다고 이해될 만한 발언을 했다가 나중에 속도조절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는 걸 강조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발언의 비중이 ‘내용’에서 ‘표현’으로 옮겨간 것이다.
해당 발언을 전후로 더불어민주당·열린민주당 의원 16명이 모인 ‘처럼회’는 ‘중대범죄수사청 설치 입법 공청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는 검찰에 대한 강경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중수처 설치를 위한 가속페달을 밟은 것이다. 또한 박범계 장관은 24일 “저는 법무부 장관이지만 기본적으로 여당 국회의원이다”라며 중수처 관련해서 당론을 따르겠다고 언급했다. 이 부분도 ‘파격’이다.
정파를 초월해서 중립적인 입장을 가져야 할 정부 기관의 장이 이런 발언을 하면,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입장은 곤란해질 수 있다. 이런 일련의 전개 과정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여권이 입을 모아 당청 간의 이견이 없다고 말하지만, 대통령의 의중과 여권 의원들의 행동 사이에 괴리가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야당은 레임덕이라는 주장을 편다. 여기에도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여론조사 상으로는 대통령의 지지율이 민주당의 지지율보다는 높은데, 일반적으로 이럴 경우 레임덕이 가시화되기는 힘들다. 26일 발표한 한국갤럽여론조사(23~25일 성인 1004명 대상,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 응답률 14%, 자세한 사항은 조사기관 또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를 보더라도 대통령의 지지율이 민주당 지지율을 앞선다. 대통령이 당의 지지율을 떠받치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은 대통령의 의중을 해석하기보다는 무조건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만일 중수청 설치가 앞으로 있을 보궐선거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안이라면 또 모르겠다. 정당의 입장에서는 선거에서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강박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수청 문제는 4월 보궐선거와 직결된 사안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차기 대선과 관련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청와대는 임기 말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바라는 반면, 여당은 개혁적 이미지 강화를 통한 정권 재창출에 역점을 두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신현수 민정수석의 사표 파동은 여당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줬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더 놔뒀다가 핵심 지지층마저 떠나면 대선이 어려워진다는 위기감을 가졌을 법하다. 상황이 이렇다면 대통령의 의중이 어떻든 간에, 여당은 중수청 설치를 밀어 붙일 수 있다.
이것도 레임덕은 레임덕인 것 같다. 여권의 중심이 대통령에서 정권 재창출로 옮겨 간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레임덕은 분명 새로운 현상이다. 과거 레임덕은 대통령 지지율 폭락과 같은 외부적 상황에서 시작했지만, 현재는 내부로부터 레임덕이 비롯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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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율 명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