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민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이 2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했다. 사진=박은숙 기자
“역대 가장 좋은 성과를 낸 당·정·청이라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2월 19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한 여당 지도부와의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참석자들에게 당청 간 호흡을 강조하며 마지막 해 ‘원팀’ 기조를 지켜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복수의 참석자들에 따르면 이날 간담회는 그 어느 때보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고 한다.
하지만 간담회가 열리던 날 민주당 내부에선 청와대를 향한 날선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의 표명 뒤 휴가를 낸 것으로 알려진 신현수 민정수석이 주요 ‘타깃’이었지만 문재인 대통령 이름도 거론됐다. ‘검찰 출신 신현수’를 민정수석으로 발탁한 것 자체가 애초부터 부적절한 인사였다는 내용이었다. 집권당이, 그것도 친문계가 압도적인 민주당이 문 대통령이 단행한 인사를 꼬집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다.
우여곡절 끝에 신현수 수석은 복귀했다. 청와대는 구체적인 과정은 밝히지 않았지만 검찰 고위직 인사를 놓고 신 수석과 박범계 장관 간에 충돌이 있었음은 인정했다. 그 이면엔 친문 강경파가 주도하는 중대범죄수사청(중대청) 설치를 둘러싼 여권 내 온도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신현수 수석은 최대한 신중하게 추진하자는 입장을 내비쳤다가 일부 친문 인사들에게 소위 ‘찍힌’ 것으로 전해진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고위직 출신의 한 정치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 인사 패싱 파동의 결론만 말하면 ‘신 수석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 수석을 빼고 했겠지. 친문 쪽에선 신 수석을 두고 대놓고 ‘검찰 편’이라고 하더라. 중대청 설치에 부정적인 발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사의를 표명했을 때도 친문 진영에선 ‘차라리 잘됐다’며 원색적인 비난이 나왔다.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준 문 대통령을 두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후회할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친문계 기류는 2월 24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이날 위원회에선 유영민 청와대 비서실장과 민주당 간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유영민 실장은 중대범죄수사청 설치 등 ‘검찰개혁 시즌2’에 대한 야당 의원 질문에 “문재인 대통령이 박범계 법무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주던 날 속도조절을 당부했다”고 답했다. 그러자 운영위원장인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가 “대통령의 정확한 워딩이 ‘속도조절은 아니잖아요?”라고 되물었다.
이에 유영민 실장은 “정확한 워딩은 그게 아니었지만, 그런 의미의 표현을 하셨다는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이 속도조절을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취지로 말을 했다는 의미였다. 파장이 커지자 유 실장은 운영위원회가 끝나기 전 “확인 결과 (대통령의) 표현에 속도조절은 아니고, 검찰개혁이 잘 안착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라며 “워딩에 없다는 거 다시 확인 드리겠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 사진=청와대 제공
이를 두고 정치권 관계자들은 여권의 현 지형을 잘 나타내주는 장면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중진 의원은 “현직 비서실장이 말한 내용에 대해 집권당 원내대표가 공개적으로 반박하다시피 한 것은 본 적이 없다. 전임 실장인 임종석, 노영민 때였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라면서 “청와대가 힘이 빠졌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한 초선 의원도 “문 대통령이 발언할 당시의 분위기, 뉘앙스 등은 누구보다 유 실장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속도조절’ 발언이 직접적인 대통령 워딩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유 실장으로선 충분히 취지를 살려서 발언했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그런데 나중에 재확인까지 해가며 결국 김태년 원내대표 지적대로 수정하는, 일련의 과정은 청와대가 당의 눈치를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했다.
민주당이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중대범죄수사청에 대한 청와대 기류는 실제 ‘신중론’이 우세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 대통령 대선 공약이었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를 마무리한 상황에서 다시 한 번 검찰개혁을 놓고 소용돌이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주를 이루고 있다. 유영민 비서실장이 국회에서 속도조절을 언급한 것도 그 연장선상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유 실장은 당의 압박에 사실상 말을 바꾼 셈이 됐다.
이는 국정 주도권의 무게 추가 청와대에서 당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과 무관하지 않다. 일각에선 이번 유영민 실장 건을 두고 이낙연 대표가 지난 1월 1일 이명박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꺼냈다가 곤욕을 치렀던 사례를 떠올리기 한다. 둘 다 청와대의 대체적인 견해를 밝힌 것이지만 여권, 특히 친문 강경 지지층의 거센 반발로 한발 물러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강경파로 통하는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선 최근 문 대통령 핵심 측근으로 알려진 한 친문 인사에 대한 비판도 거론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중대범죄수사청 설치 등에 있어서 속도조절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게 그 인사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란 이유다. 심지어는 문 대통령이 주요 현안을 그 인사와 함께 비공식적으로 논의하고 있다는 의심까지 나온다. 이른바 ‘비선 논란’이다. 야권이 아닌 여권, 그것도 친문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들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여권에선 우려가 크다. 강경 스탠스를 고수하는 친문 인사들의 목소리가 커질 경우 문 대통령 힘이 빠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 친문 재선 의원은 “친문이라 하면 말 그대로, ‘문재인 친위대’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행보는 오히려 문 대통령을 어렵게 하고 있다. 또 그들은 ‘진짜 친문’이 아니다”라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야심보단 문 대통령 성공을 앞에 둬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친문 간 내홍이 불거질 수도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 재선 의원은 신 수석 사태와 관련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그는 “문 대통령이 신 수석 사의를 반려한 것에 대해 비판이 나오고 있다. 또 신 수석이 조만간 그만둘 수밖에 없다는 말도 공공연히 한다. 이는 문 대통령 인사권을 부정하는 것”이라면서 “문 대통령은 아직 임기가 1년 이상 남았다. 할 일이 많다. 그런데도 중요한 선거를 앞에 두고 있는 당이 자꾸 문 대통령과 청와대를 옥죄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러한 친문 진영 내부 상황은 차기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안정적인 국정운영에 방점이 찍혀있는 청와대와는 달리 친문에선 ‘포스트 문재인’ 채비에 주력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서 친문계 분화는 빠른 속도로 이뤄지고 있다. 여권 차기 주자군인 이재명 이낙연 정세균 등과의 연결점을 찾거나 제3후보론을 모색하는 방법으로다. 통상 정권 말 보이는 집권당의 이런 행보는 대통령 레임덕의 징후로 해석되곤 했다.
청와대 출신 친문 초선 의원은 “일부 강경한 의원들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개혁이라는 큰 틀에서 이견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이걸 두고 갈등이라고 봐선 안 된다”고 해명했다. 그는 “과거였다면 대통령 레임덕 얘기가 백 번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선 대통령 지지율이 40%대로 굳건하다. 무엇보다 과거 김영삼 정부 때의 이회창이나 이명박 정부 때의 박근혜처럼 민주당에서 대통령과 맞선 차기 주자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