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다운 말투였다.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로 미국 유수의 영화 시상식에서 무려 26개 여우조연상을 독식한 윤여정이지만, 그는 우쭐대는 법이 없었다. 특유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엄살이 섞인 뉘앙스로 “상패는 하나밖에 못 받아서 아직 실감이 안 난다”고 농담을 건넸다.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로 미국 유수의 영화 시상식에서 무려 26개 여우조연상을 독식한 윤여정의 소감은 “나라가 넓으니 상이 많구나 정도만 생각했죠”였다. 우쭐대는 법이 없는 윤여정다운 말투다. 사진=영화 ‘미나리’ 홍보 스틸 컷
3월 3일 ‘미나리’의 개봉을 앞두고 2월 26일 온라인 화상으로 ‘미나리’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윤여정은 대중의 높은 기대에 대한 부담감을 드러냈다. 소감을 말해달라며 가장 먼저 발언권을 얻게 된 윤여정은 “나이 순이군요”고 장난을 치면서도 “한국 관객이 ‘미나리’를 어떻게 보실지 궁금하다. 우리는 그냥 식구처럼 (모여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며 “이런 관심을 생각도, 기대도 안 했다. 처음에는 좋았는데 지금은 걱정스럽고 떨린다. 실망하실까봐”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윤여정은 럭비공 같다. 그의 연기 인생은 어디로 튈지 몰랐다. 그가 영화와 드라마 외에도 예능에서 큰 활약을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한민국 또래(윤여정은 1947년생이다)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항상 탈피한다. 그래서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항상 즐겁고 흥미롭다. 예상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날 간담회에서도 영화에 관한 천편일률적인 이야기가 오가자 “전 딴 얘기 해줄게요”라며 ‘부하’라고 부른다는 홍여울 작가와 이인아 PD 이야기를 꺼냈다. 두 사람은 ‘미나리’를 찍는 동안 윤여정과 동행한 지인이다.
윤여정은 “(이)인아는 ‘미나리’가 인디 영화인데 못 먹고 있으면 어떡하나 제 걱정을 하다가 휴가를 내고 쫓아왔다. (홍)여울이는 영화 번역하는 친구인데 할리우드 영화 어떻게 찍나 보러 왔다”며 “이들도 고등 교육을 받았는데, 미국에 와서 밥을 하며 밥순이가 됐다. ‘선생님을 보호해야 한다’며 도왔다. 우리야 얼굴이 나가서 이 영광을 누리는데, 정말 노력한 사람은 이 둘”이라고 말했다.
‘미나리’ 속 윤여정이 연기하는 할머니 순자 역시 전형성을 벗어던진다. 딸과 손주들을 위해 먼 미국 땅으로 건너 온 순자에게 손주들은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라고 말한다. 아이들에게 화투를 가르치고, 놀리며 친구처럼 어우러지는 그의 모습은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내 손주들의 마음을 열게 만든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왜 윤여정에게 26개의 여우조연상이 허락됐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마저도 정이삭 감독의 공으로 돌린다.
그는 “제가 중점을 두고 연기한 건 아니고, 감독이 그렇게 썼다. 어떤 감독들은 배우들을 가둬둔다. ‘이렇게 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 역할 하니 흉내내? 제스처 필요해’라고 물으니 정 감독은 ‘절대 그럴 필요 없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속으로 정 감독에게 A+를 줬다”며 “덕분에 자유를 얻었다. 자유롭게 연기하며 나온 것이지 계획한 것은 아니다. 내가 계획적으로 하는 사람은 못 된다”고 자신을 낮췄다.
‘미나리’ 속 윤여정이 연기하는 할머니 순자 역시 전형성을 벗어던진다. 딸과 손주들을 위해 먼 미국 땅으로 건너 온 순자에게 손주들은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라고 말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화투를 가르치고, 놀리며 친구처럼 어우러진다. 사진=영화 ‘미나리’ 홍보 스틸 컷
‘미나리’의 성공과 함께 윤여정의 영어 실력도 새삼 주목받고 있다. 정작 이 영화 속에서는 영어를 잘 못하는 할머니로 그려지지만 그가 미국 선댄스영화제 등에서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유튜브 등에서 화제를 모으며 ‘윤선생 영어교실’이라는 표현이 생겼다. 게다가 그는 케이블채널 tvN 예능 ‘윤스테이’에서도 특유의 영어 실력으로 시청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런 그의 영어 실력은 십수년에 걸친 미국 생활을 통해 쌓였다. 윤여정은 전성기를 누리던 지난 1972년 가수 조영남과 미국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1984년 이혼 후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그는 미국 시카고에서 생활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당시 배운 영어가 뒤늦게 그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것이란 사실을.
윤여정은 과거 MBC 예능 ‘무릎팍도사’에서 “결혼은 장렬하게 끝이 났다. 이후 브라운관에 복귀하며 생계형 여배우로 살았다. 두 아들 양육도 맡아 돈이 필요했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많은 위자료를 받지 않았다. 전셋값 5500만 원이었는데 500만 원은 우리 엄마에게 빌린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의 미국 생활은 ‘미나리’ 촬영에도 영향을 끼쳤다. 극 중 순자가 밤을 입으로 잘라 속을 빼낸 후 손주에게 건네는 장면은 퍽 인상적이다. 이 장면은 윤여정의 애드리브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가 미국에서 옛날에 산 경험이 있다”는 윤여정은 “제가 봤다 그걸. 제 친구의 어머니가 와서 손자한테 밤을 그렇게 까 주더라. 그 모습을 보고 (함께 출연한) 사람들이 너무 놀랐다. 그래서 간염이 많다. 더럽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미나리’는 윤여정에게 어떤 작품일까. 이 질문에 윤여정은 “저에게 굉장한 경악을 금치 못하는 놀라움을 준 작품”이라며 “선댄스에서 영화 상영 후 사람들이 막 울더라. 정 감독 무대 위로 불렀는데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박수를 치길래 (나는) 그때 울었다. 우리는 이런 장면을 상상하지 않고 만들었기 때문에 경악스러울 뿐”이라고 전했다.
‘미나리’는 윤여정에게도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많은 상을 받아서가 아니다. 제일 기억을 남는 순간을 말해 달라는 주문에, 윤여정은 영화 촬영이 끝난 뒤를 언급했다. 당시 정 감독은 ‘미나리’의 출연진을 데리고 윤여정이 머물던 집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그에게 큰절을 올렸다.
윤여정은 “정 감독이 사람들을 데려와서 큰절을 시키더라. 너무 깜짝 놀랐다. 그 순간이 제일 좋았다”며 “정 감독의 그 배려심에 놀랐다. 촬영이 이렇게 힘든데…. 어디서 큰절을 배워왔더라. 그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이제 시선은 윤여정의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지정 및 수상 여부로 쏠린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3월 중순 후보를 발표한 후 4월 온라인으로 열린다. 2020년 ‘기생충’이 작품상을 포함해 4관왕에 오를 때도 출연 배우들은 후보조차 오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윤여정이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의 벽을 허물지 여부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윤여정은 현재 세계적인 온라인 스트리밍 업체인 애플TV플러스 드라마 ‘파친코’를 촬영 중이다. 이 작품 역시 ‘미나리’처럼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원작을 기반으로 제작된다. 윤여정은 이 작품에서는 ‘미나리’ 속 순자와는 또 다른 결을 가진 인물을 연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촬영하고 있다”며 “영어 하려다 한국어 하려니 복잡하다”고 또 엄살을 부렸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