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준(왼쪽)이 커제를 꺾고 LG배 우승을, 신진서도 농심배에서 커제를 마지막에 꺾으면서 한국에 우승컵을 안겼다. 2010년대 들어 중국에 계속 고전했던 한국 바둑은 ‘양신’의 활약으로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무엇보다 그동안 한국 바둑의 벽으로 군림한 커제를 완파하면서 세계바둑 판도에도 확실한 균열을 냈다. 커제 9단과의 상대전적은 5승 10패 여전히 열세지만 신진서의 가파른 상승세는 이미 커제를 넘어섰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신진서는 “커제가 나를 이길 때마다 도발적인 발언을 했다. 결승(삼성화재배)에서 그렇게 지고 나면 사실 많이 힘들고 쓰러지고 싶은데, 커제의 도발적인 말로 인해 오히려 다시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며 생채기를 남겼던 상대에게 오히려 승자의 여유를 보였다
신진서는 다음 목표를 묻는 질문에 “결승에 올라있는 응씨배와 춘란배 모두 반드시 우승하고 싶다. 만일 응씨배와 춘란배에서 모두 우승한다면 세계 일인자 자리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한·중·일을 대표하는 5명의 기사가 연승전 방식으로 우승을 겨루는 농심배는 유일한 국가대항 단체전인 만큼 각국의 자존심이 걸린 대회다. 한국은 이번에 홍기표 9단, 강동윤 9단, 신민준 9단, 신진서 9단, 박정환 9단을 내세워 3년 만에 우승컵을 되찾아왔다. 중국은 8회, 일본은 1회 농심배를 제패했다.
#한국 “이제는 한번 해볼 만하다”
신진서에 앞서 신민준 9단이 LG배 세계대회에서 커제 9단을 꺾고 우승하면서 ‘양신(兩申)’의 협공을 앞세운 한국 바둑이 다시 중국의 만리장성을 넘어설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다. 사실 중국은 1989년 조훈현 9단의 응씨배 우승을 시작으로 이창호, 이세돌로 이어지는 한국 바둑의 권세에 근 20여 년을 눌려 지내는 굴욕의 시간을 보냈다.
중국랭킹 1위 커제 9단. 한때 한국 바둑 킬러로 불렸지만 최근 성적은 좋지 못하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이 시기, 중국에 밀려난 한국은 다시 세계 정상에 오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2012년에 도입한 ‘영재입단제도’였다. 그리고 제1회 영재입단제도를 통해 신진서와 신민준이 배출됐던 것. 이들이 한국 바둑의 주류로 자리 잡으면서 한국은 마침내 다시 중국을 따라잡는다.
그동안 한국은 중국에 비해 최정상권의 실력은 밀리지 않는데 층이 엷다보니 중국의 물량공세를 당해내지 못하는 양상을 보여 왔다. 하지만 이젠 신진서, 신민준 투톱에 기존강자 박정환 그리고 얼마 전 TWT배(우승상금 1억 2000만 원의 세계온라인바둑대회)에서 우승한 변상일까지 더하면 양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한번 해볼 만하다는 소리가 높다.
#중국 “세계 최강국 지위 포기 못해”
중국은 커제가 LG배 결승에서 신민준에게 패하고 농심배에선 신진서에게 5연승을 허용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중국기원 주궈핑 원장은 코로나19로 인해 중단됐던 국가바둑팀 집단훈련체제를 즉각 재가동한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중국 팬들의 분노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바둑팬들은 댓글을 통해 “양딩신, 네가 지금 파마머리에 신경 쓸 때냐”라거나 “커제는 당장 대학을 때려치우고 바둑 공부에 전념하라”는 등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고 있다. 특히 커제에 대한 비난이 하도 거세, 일부에서는 “그동안 커제가 이룬 공적을 생각해서라도 비난을 멈춰야 한다”는 동정론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언론도 중국의 부진 이유와 한국의 약진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그중 중국 국가대표팀 코치 위빈 9단이 한국과 중국의 인공지능(AI) 활용 방법의 차이에 주목한 것이 관심을 끌었다.
위빈은 “중국은 집단연구에서 절예만을 사용한다. 그런데 절예는 보여주는 참고도의 수준이 너무 높아 실제 기사들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참고로 절예는 알파고가 은퇴한 후 중국 텐센트 사가 개발한 인공지능으로 현재 가장 높은 수준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이다). 중국 기사들은 본인의 기량을 올리는데 인공지능을 참고하긴 하지만, 적극적으로 이용하지는 않는다. 반면 한국 기사들은 절예는 없지만 카타고, 엘프고, 릴라제로에 한국에서 개발된 각종 프로그램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인공지능 활용방법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위빈은 “한국이 일시적으로 좋은 성적을 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흐트러진 연구체제를 정비하고 한국 기사들 연구에 힘을 기울인다면 세계바둑의 중심은 여전히 중국 안에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바둑계 한 관계자는 “한국 바둑이 올라오면서 다시 세계바둑 판도가 재미있어졌다. 중국도 근 몇 년 계속 우승하면서 기사들은 물론 팬들도 매너리즘에 빠졌던 게 사실”이라며 “중국인들의 두뇌스포츠 바둑에 대한 애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최근 코로나19 등으로 인기가 예전만 못했는데 한국과 다시 치열한 경쟁을 해나가면 양국 바둑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과 중국의 바둑 전쟁은 이제 3라운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