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권시장에서 촉발된 스팩주 열풍이 국내 증권시장에서 이어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스팩은 비상장기업의 인수 합병을 목적으로 설립된 서류상 회사다. 증권사에서 설립한 후 투자금을 공모해 코스닥 시장에 상장한다. 상장 이후 적절한 기업을 찾아 합병에 성공하면, 스팩 주주들은 합병 비율에 따라 일정한 수의 합병회사 주식을 갖게 된다. 증권사가 합병 대상만 잘 고른다면 복잡한 절차 없이 손쉽게 비상장 우량기업을 상장기업으로 만들 수 있다.
절차가 일반적인 IPO와는 반대이기 때문에 ‘백지수표 회사’로도 불린다. 합병 후 주가가 합병 기준가보다 높게 형성되면, 기존 주주들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3년 안에 합병 대상 기업을 찾지 못한다면, 스팩은 강제로 해산되고 주주는 투자금과 이자를 돌려받는다.
현재 스팩이 가장 뜨거운 곳은 미국이다. 글로벌 금융정보업체 리피니티브 자료를 보면 2월에만 50건의 거래가 스팩을 통해 성사됐고, 1090억 달러가 움직였다. 올해 미국에서 스팩으로 모집된 자금만 580억 달러에 달한다. 지난 한 해를 통틀어 모집한 자금이 832억 달러(약 92조 9344억 원)였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속도다. 2018년만 해도 107억 달러(약 11조 9519억 원)에 불과했다.
잠재력이 큰 신생회사들이 피인수대상에 오르며 시장을 달구고 있다. 지난 2월 이뤄진 가장 큰 거래는 테슬라의 대항마로 여겨지는 ‘루시드모터스’와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된 스팩 ‘처칠캐피털Ⅳ’의 합병이다. 합병법인 상장시 루시드모터스의 시가총액은 240억 달러(약 26조 6000억 원)로 추정된다. ‘처칠캐피털Ⅳ’은 마이클 클라인 시티은행 전 최고경영자(CEO)가 설립했다.
에어택시 개발회사 ‘조비(Joby)’도 스팩을 통해 우회상장한다. 조비는 링크드인 공동 창업자 리드 호프만과 비디오 게임사 징가 설립자 마크 핀커스 등이 투자해 설립한 ‘리인벤트 테크놀러지 파트너스’와 합병할 예정이다. 상장에 성공하면 기업가치가 66억달러(약 7조 3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조비의 경쟁사인 아처항공(Archer Aviation)도 미국 억만장자 투자자 켄 모엘리스가 지원하는 스팩과 합병한다. 38억 달러(약 4조 2800억 원)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헬리콥터 사업을 하는 블레이드도 스팩과의 합병에 나섰다.
미국의 스팩들은 인수 대상을 유럽의 유망 기술기업들로 확대하고 있다. 뉴욕에 상장된 스팩인 테일윈드 인터내셔널은 3억 4500만 달러의 자금을 모집했는데, 이는 유럽 기술기업과의 합병을 목표로 한다. 영국의 중고차 사이트 카주(Cazoo)와 헬스케어앱 바빌론 등은 이미 미국 스팩과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유명인들의 이름도 연달아 등장한다. 억만장자 헤지펀드 매니저 빌 아크만부터 테니스 챔피언 서리나 윌리엄스, 래퍼 제이지 등이 잇따라 스팩에 뛰어들었다. 홍콩 최고 부호 리카싱 창장그룹 회장도 최근 미국에서 스팩을 상장해 4억 달러(약 4430억 4000만 원)를 조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등 홍콩 자산가들도 이미 스팩 열풍에 가담하고 있다. 홍콩거래소, 런던거래소, 싱가포르거래소 등이 새로운 방식의 자금조달 창구로 스팩제도 허용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에서도 2월 공모청약을 진행한 스팩 상당수가 두 자릿수를 넘어 세 자릿수 청약 경쟁률을 기록했다. 지난 한 해 동안 공모 청약을 한 스팩 19개사의 평균 경쟁률은 3.14 대 1에 그쳤다. 그중 10곳은 경쟁률이 1 대 1에도 못 미쳐 청약이 미달하기도 했다. 급격한 변화다. 합병 대상 기업을 찾는 데 성공한 스팩들의 주가가 큰 폭으로 오른 것이 자극제가 됐다. 3월 12일 현대무벡스와의 합병 상장을 앞둔 엔에이치스팩14호는 한때 주가가 5600원을 넘었는데, 이는 합병가액(2000원)보다 180% 높은 가격이다. 3월 31일 제이시스메디칼과 합병하는 유안타제3호스팩도 합병가액과 비교해 88% 이상 올랐다.
최종경 흥국증권 연구원은 “합병 상장을 앞둔 스팩주가 대부분 합병가액을 크게 웃돌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면서 “스팩은 주가의 하방 경직성이 강해 주식시장이 조정기에 접어들더라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투자처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자본금과 상장 주식수가 적은 이른바 ‘품절주’ 스팩은 유동성 위험이 존재한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주가를 움직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박종선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스팩은 상장되기까지 수년의 시간이 걸리며 타 기업과의 합병이 보장된 것도 아닌데, 그러한 시장에도 자금이 활발히 유입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유동성이 풍부하다는 방증”이라며 “전문가가 아닌 초보 투자자들이 스팩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섣불리 목돈을 넣는다면 원금을 보장받지 못하고 청산 당할 수 있다”며 투자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