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3일 최태원 신임 서울상의 회장과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이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서울상의 의원총회에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새롭게 떠오르는 ‘대한상의’
지난 2월 경제4단체 중 3곳이 차례대로 차기 수장을 결정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3일 서울상의 회장으로 선출됐다. 관례상 서울상의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을 겸해왔다. 3월 24일 대한상의 의원총회에서 회장으로 올라설 예정이다. 24일에는 구자열 LS그룹 회장이 한국무역협회장으로 선임됐다. 허창수 GS그룹 명예회장은 26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을 6번째 맡으면서 최장수 회장에 이름을 올렸다. 중소기업중앙회장은 2019년 선출된 김기문 제이에스티나 회장이 임기를 수행 중이다. 경제4단체 수장을 모두 기업인이 맡게 된 셈이다.
이 중 가장 주목할 곳이 대한상의다. 경제단체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1884년 창립된 ‘한성상업회의소’를 그 뿌리로 두고 있다. 구한말 일본 상인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종로의 육의전 상인들이 만든 민족계 상인조직이다. 1948년 대한상공회의소로 명칭이 변경됐다. 현재는 중소기업부터 대기업까지 아우르는 국내 최대 종합경제단체로 성장했다. 서울상의를 비롯해 전국 73개 지방 상공회의소를 대표한다. 전국 회원사는 18만 개, 전 세계 130여 국의 상공회의소와 글로벌 네트워크가 구축돼 있다. 특히 각종 경제 관련 법안과 정책 관련해 국회, 정부, 지자체 등에 재계 입장을 대변하고 회원사의 이익을 옹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총 14명이 대한상의 역대 회장직을 맡았다. 이중재 초대회장을 시작으로 이세현 조양견직 회장, 송대순 대한증권 사장, 전용순 금강제약소 회장, 전택보 천우사 회장, 박두병 동양맥주 회장, 김성곤 쌍용양회공업 회장, 태완선 대한중석광업 회장, 김영선 대한재보험 회장, 정수창 동양맥주 회장, 김상하 삼양사 회장,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손경식 CJ 회장,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 등이다. 회장의 임기는 3년이며 한 차례 연임할 수 있다.
과거 대한상의의 위상은 높지 않았다. 회장단도 주로 정부에 반대를 표하기 어려운 정치인들과 중견기업 위주로 구성됐다. 이중재 초대회장은 취임 3개월 만에 재무부 장관으로 불려갔다. 태완선, 김영선, 전용순 회장은 정치인 출신이다. 그나마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이 1967년부터 3연임을 하면서 대한상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두산그룹은 4명의 회장을 배출했다. 한국 재벌의 효시인 삼양사 김상하 회장이 13~16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문제는 두산그룹을 제외하면 무게감 있는 재벌과 대기업이 회장단에 들어오지 않으면서 영향력을 키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실제 재벌이나 대기업 총수들은 재계 대표단체로 꼽히는 전경련을 주로 맡았다. 4대그룹 총수가 마지막으로 경제단체 수장을 지낸 곳도 전경련이다. 1998년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전경련 회장에 올랐다. 최태원 회장의 선친인 최종현 SK그룹 회장도 전경련 회장직을 지냈다. 이 밖에도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구자경 LG그룹 회장 등이 역대 회장직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최태원 회장이 이번에 대한상의를 맡으면서 위상이 남달라졌다는 평가다. 국내 4대그룹 총수가 대한상의를 이끄는 건 처음이다. 특히 최 회장은 신구세대의 통합에 나설 것으로 기대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3세 오너’ 그룹에서 맏형이며, 지속적으로 만남을 갖고 있다. 1998년 회장에 취임하면서 1~2세대 재계 원로들과도 친밀하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대한상의가 재계와 정부의 소통 창구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도 무게감을 더한다.
새롭게 합류한 서울상의 부회장단도 이목을 끈다.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 △김범수 카카오 의장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박지원 두산 부회장 △이한주 베스핀글로벌 대표 △이형희 SK SV위원회 위원장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 등 7명이다. 대한상의가 4차 산업을 이끄는 금융·IT 기업의 젊은 수장들도 재계 주류로 부상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준 것이다.
아래줄 왼쪽부터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지난 2016년 기업총수들이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위 제1차 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재계 소통창구 ‘전경련’의 추락
대한상의가 떠오르게 된 배경 중 하나로 전경련의 추락이 꼽힌다.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전경련의 입지는 바닥으로 고꾸라진 상태다. 그해 전경련 전체 연간회비의 약 80%를 부담하던 4대그룹 모두 전경련을 탈퇴했다. 청와대와 정부, 여야 정치권이 모두 경제계 소통 창구로 전경련을 찾던 화려했던 시절은 끝났다. 현재도 대통령 해외 순방 경제사절단을 비롯해 청와대 경제인 초청행사, 경제장관회의, 여당 주최 경제단체장 간담회 등에서 제외될 정도다. 정부가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셈이다. 허창수 회장이 2017년과 2019년에 이어 올해까지 퇴진 의사를 밝혔음에도 후임을 찾지 못한 이유를 여기서 찾는 분석도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흡수 통합론을 제시한 것은 전경련의 현재의 위상을 말해준다. 전경련에서 노사문제에 집중하는 기관으로 나간 ‘동생 단체’인 경총의 제안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지난 2월 24일 손경식 경총 회장은 “전경련에 통합을 제의했다”고 밝혔다. 바로 다음날 권태신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공식적이고 구체적인 제안은 없었다.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다”라고 통합설에 선을 그었다.
앞서 2016년 전경련은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됐다. 재계 총수들이 국회 청문회에 출석하고 특검 수사와 재판을 받으면서 ‘정경유착’의 민낯을 보여줬다. 수십 년을 이어온 ‘재계의 맏형’의 자리는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는 정·재계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전경련은 그간 정경유착의 역할을 수행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마다 위기를 모면해왔기 때문이다. 전경련은 △1988년 일해재단 자금모금 사건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대선비자금 제공 △2002년 불법대선자금 차떼기 사건 △2011년 주요 회원사들의 로비 대상 정치인 할당문건 등 대기업들의 정·관계 청탁을 주도하면서 사회적 물의를 빚은 바 있다.
이에 대해 국가미래연구원·경제개혁연대는 성명서를 내고 “전경련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형식적인 사과와 윤리선언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할 뿐 근본적인 자정과 개혁 노력은 도외시했다”며 “한국경제는 발전했고, 세계 경제도 달라졌다. 변화된 환경에 변화하지 못한 전경련은 자정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지적했다.
다만 대한상의가 과거 전경련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린다. 전경련은 재벌과 대기업 중심으로 현안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재계의 소통 창구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대한상의는 대기업부터 중견·중소기업까지 회원사로 두고 있어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정 단체라 활동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관측도 있다.
이와 관련, 대한상의 관계자는 “법정 단체라고 해도 정부에 반대하는 게 어렵지 않다”며 “회원사들의 입장을 낼 필요가 있다면 정부나 지자체에 건의하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