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를 장식하는 매듭과 술.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
우리 전통 매듭의 유래를 정확히 밝히기는 쉽지 않다. 청동기 시대 유물인 방추차(섬유질을 이어 꼬아 실을 만드는 데 쓰였던 도구) 등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 매듭이 일찍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고분인 안악3호분 벽화에서는 묘주 부부의 초상에서 매듭의 흔적이 발견된다. 불화나 불상, 범종 등 여러 가지 불교 유물에서도 극락장엄을 표현하기 위한 장식물로서 매듭이 활용되었다.
김희진 명예보유자가 매듭을 맺고 있다. 사진=문화재청 제공
매듭은 우리나라 옛 문헌에서 ‘맺고 묶는다’는 뜻의 한자 결(結) 또는 결자(結子)로 표기되었는데,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도 ‘결’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매듭’이라는 우리 용어는 조선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등에서는 결자를 ‘매즙’(每緝)이라 칭했는데, 이것이 ‘맺는다’는 의미의 순수한 우리말인 매듭으로 변한 것이다.
동아시아 삼국의 매듭은 비슷한 면이 있는 반면 차이점도 적지 않다. 중국 매듭은 종류가 다양하고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매듭을 크고 화려하게 만들기 위해 별도의 끈을 중간에 추가로 넣어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일본의 매듭은 장식성보다는 끈의 기능에 중점을 두었다. 반면 우리 전통매듭은 하나의 끈목을 이용하여 모양을 맺고 아래에 술을 달아 단아한 비례미와 율동미를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연봉매듭과 국화매듭, 잠자리매듭 등 동식물에서 따온 형태와 명칭이 많은데, 자연과 사물을 매듭과 술에 담아 단아한 기품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끈목 만드는 과정. 사진=문화재청 제공
매듭은 우리나라에서 노리개 등 갖가지 장식물과 방한용 모자, 머리쓰개 등의 실용품, 발걸이 같은 실내용품 등 끈이 필요한 부분에 꾸밈을 더하기 위해 두루 사용됐다. 왕실에서도 위상을 표현하기 위해 어진장황(임금의 얼굴 그림이나 사진을 담은 족자), 어보, 의장 등에 매듭과 술을 활용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매듭장들을 국가에 소속시켜 일하도록 했는데, 이는 매듭이 우리 복식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문적인 장인만이 매듭을 제작하였던 것은 아니다. 궁중 내인(내명부)들은 다회치기와 매듭짓기로 수백 년 세월을 보냈으며, 민가에서도 여러 장인과 여성들이 끈목과 매듭을 만들어 썼다.
잠자리매듭의 모습.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
우리 전통 매듭의 제작 과정은 결코 간단치 않다. 천연재료와 다양한 도구를 활용해 실을 염색, 건조, 풀기, 합사(두 올 이상의 실을 합하는 작업)하는 공정을 거쳐 끈목을 짠 뒤, 종류와 목적에 따라 각각의 매듭을 맺는 작업이 이뤄진다. 끈목의 재료로는 명주실을 비롯해 모시실, 닥나무실 등이 쓰이며, 끈의 색감, 굵기, 맺는 방법에 따라 매듭의 형태가 다양하다. 또한 매듭과 짝을 이루어 사용되는 술을 만드는 데도 여러 어려운 공정을 거치게 된다. 매듭을 만드는 일에는 섬세하고 남다른 손의 감각과 더불어 꾸밈의 주체가 되는 물건과 색상에 대한 안목, 까다롭고 지난한 과정을 창의성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끈기와 미적 철학이 필요하다. 매듭을 ‘손의 언어’이자 ‘마음의 꽃’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20년대만 해도 서울 시구문 일대(현 광희동 부근)는 ‘매듭의 본고장’이라 불렸는데, 이는 이곳에 많은 매듭장과 다회장이 거주하며 서로 협업해 매듭 제작의 전통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 전통공예 문화가 훼손되고 서구 문물의 급격한 도래로 사회적 수요가 줄어들면서 전통 매듭도 쇠락하게 되었다. ‘광희동 매듭장’의 명맥은 1968년 정연수 선생이 초대 매듭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면서 다시 이어졌다. 뒤를 이어 1976년 그의 부인 최은순과 제자 김희진이 보유자(현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었으며, 현재는 정연수의 딸 정봉섭과 김희진의 제자 김혜순이 매듭장 보유자로서 전승 활동을 하고 있다.
자료 협조=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