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더불어민주당 공동상임선대위원장. 사진=박은숙 기자
[일요신문]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는 시종일관 경제를 강조했다. 이명박 캠프의 슬로건은 ‘서민을 따뜻하게 중산층을 두텁게’였고 국정 목표와 기조는 활기찬 시장경제, 선 성장 후 복지 등이었다.
10년이 지나고 이명박 정부가 주장한 ‘대기업 중심의 성장과 낙수효과’가 실현된 사례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2007년 국민들은 이명박 후보의 ‘경제 대통령’이라는 표어를 철석같이 믿었다. 참여정부의 경제(부동산) 실패를 해결할 적임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참여정부는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주거 안정화를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부동산은 잡히지 않았다. 잇따른 부동산 정책 실패로 여론은 악화되고 집값은 요동쳤다. 서민들 사이에선 월급쟁이는 평생 일해도 집 한 채 가질 수 없는 시대가 왔다는 자조 섞인 비아냥도 들렸다.
정책 실패를 인정한 노무현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와 야당의 경제 파탄론이 이어지자 국민들은 경제와 성장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이명박 캠프는 이점을 공략했다. 분배보다 성장을 우선하는 신자유주의를 내걸고 국민이 바라는 ‘경제 성장’을 줄 수 있다는 확고한 시그널을 내세웠다.
그 결과 이명박 후보는 정동영 후보를 상대로 531만 표 차의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임기 내내 노무현 정부를 물고 늘어진 검찰과 언론의 역할도 컸지만 당시의 시대정신인 경제 성장을 내건 전략의 승리라는 해석도 빼놓을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의원이 9일 당대표직을 내려놨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저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겠다”며 대선 얘기를 꺼내진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대권을 향해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이낙연 의원은 올해 들어 이재명 경기지사에게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줄곧 밀렸다. 하지만 민주당 관계자들은 “대선 레이스는 길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 자신감의 바탕에는 ‘이재명 지사가 민주당 경선에서 권리당원의 벽을 넘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에 있다.
지난해 8월 민주당은 특별당규로 제20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선출 규정을 제정했다. 민주당 대선후보는 전국대의원, 권리당원 선거인단, 국민‧일반당원 선거인단, 재외국민 선거인단으로 나눠 투표하게 되는데 이 경선에서 권리당원은 승패를 좌우할 열쇠로 통한다. 특히 결집된 힘을 보여주는 친문 권리당원 진영에서 꾸준히 대립해오던 이재명 지사보다 이낙연 의원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마냥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니다. 여론조사에서 저조 일변도의 결과가 계속 찍힌다면 상황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이재명 지사에게 밀리다 못해 다른 여권 주자에게까지 밀려나면 경선은 커녕 중도 하차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여의도 정가에서는 반등하지 못하는 선호도(지지율)를 두고 이낙연 의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나 기대가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도 나온다. 회심의 이익공유제는 재계에서 볼멘소리가 나오고, 대권을 향한 포석으로 읽히던 ‘신복지’도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통해 공개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용어조차 생소하다. 이낙연 의원만이 할 수 있는 독보적인 정책이나 개성이 명확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도 약점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후보들처럼 정부 여당을 비판하며 흐름을 바꾸는 방법도 있지만 현 정권의 초대 총리이자 집권 여당의 당대표였기에 이 또한 채택하기 어려운 전략이다. 시국을 타개하는 파격적인 시대정신을 제시하기 쉽지 않을 거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반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이 점에서 이 의원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윤 총장은 4일 사직 인사에서 “검찰의 권한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닌 우리 사회의 정의와 상식,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 (사임한다)”라며 검찰에 “위급한 상황이지만 동요하지 말고 국민들만 생각하라. 검찰의 법 집행 기능은 국민 전체를 위해 공평하게 작동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윤 총장은 법치, 정의, 공정, 청년 등의 단어를 사용하며 이슈를 선점하고 있다. LH 사건에도 “즉각적인 수사를 해야 하는 사안”, “공적 정보를 도둑질해 투기한 것”, “이런 식이면 청년들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발언까지 내놨다. 일각에서는 이런 행보가 불공정을 바로잡을 대안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를 줄 수 있다고 분석한다. 정부의 조사가 국민 눈높이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윤 총장에게 반사 이익을 가져다줄 가능성도 점쳐진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사건과 속칭 국정농단(강요 및 직권남용, 뇌물)으로 무너졌다. 당시는 권력의 남용과 불통을 바로잡는 것이 시대정신 중 하나였고 문재인 후보는 국민과 소통하겠다며 광화문 집무실 이전 공약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광화문 집무실은 실현되지 못했다. 오히려 전 정권 못지않게 저조한 기자회견과 불통, 단체장들의 성범죄와 부동산 정책의 연이은 실패,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드러난 공직자의 투기 의혹이 번지며 국민에게 실망을 안겼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어떤 시대정신을 내세울지 관심이 쏠린다. 잘 고른 시대정신이 대선판의 흐름을 바꿀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분석이다.
김창의 경인본부 기자 ilyo2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