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당시 김홍일 검사가 BBK 사건 수사 결과 발표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BBK의 실소유주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왼쪽). 2009년 당시 남기춘 신임 울산지검장의 기자간담회 모습. 그는 2003년 대선자금 수사에서 살아있는 권력인 ‘노무현 캠프’에도 거침없는 칼날을 들이댄 것으로 유명하다. 연합뉴스 |
비자금조성 및 편법 상속·증여, 정·관계 로비 의혹 등 고질적인 기업 비리사건을 지긋지긋하게 지켜봐야 하는 국민들의 분노와 허탈함은 극에 달해 있다. ‘돈 놓고 돈 먹기’ 식으로 자행된 재벌가의 지저분한 돈 잔치에 신물이 난 국민들은 드라마 <대물> 속 하도야 검사를 갈망하고 있다. 김홍일 부장과 남기춘 지검장의 어깨가 그 어느때보다 무거운 이유다.
대기업에 대한 검찰의 전 방위적 사정수사가 본격화된 가운데 국민들은 이번 사건을 진두 지휘하고 있는 두 베테랑 검사의 칼끝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핵심은 기업수사에 있어 ‘독종’으로 악명 높은 이들 검사가 얼마나 예리하고 날카롭게 ‘환부’를 도려내느냐다.
재계를 벌벌 떨게 하는 저승사자로 급부상한 두 사람의 인생 역정 및 검찰 이력을 들여다 봤다.
C&그룹 수사 김홍일 대검 중수부장
C&그룹에 대한 본격적인 검찰수사가 진행됨에 따라 이번 수사를 진두지휘하는 김홍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54)이 또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1년 4개월여 만에 수사를 재개한 이번 대검 중수부를 지휘하는 김 부장은 조폭 잡는 강력통 출신으로 강력범죄 수사는 물론 기업비자금 수사와 정치권 로비 의혹 수사 등으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1956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한 김 부장은 충남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 24회에 합격하면서 법조인의 길에 들어섰다. 1986년 대구지검 검사로 임용된 이래 대검 강력과장과 서울중앙지검 강력부장, 대전지검 형사1부장, 서울중앙지검 3차장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주로 강력·특별수사 분야에서 활약했다. 검찰 요직을 두루 거친 이력만큼이나 김 부장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면서 명성을 날렸다.
서울지검 강력부장을 맡고 있던 2003년에는 연예비리 사건을 담당,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과 개그맨 서세원 씨를 구속시켰다. 또 6공 비리에 포함됐던 슬롯머신 사건 때는 현직 치안감을 직접 조사하는 열의를 보였다.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안겨줬던 엽기 사건사고들도 담당했는데 박한상 존속살해사건과 지존파 납치살해사건, 영생교 신도 암매장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뿐만 아니라 ‘내기 골프’를 즐긴 재벌 회장을 구속기소하는가 하면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 연예계 및 태권도협회 비리 등 굵직한 특수 및 강력사건을 처리해 이름을 알렸다.
김 부장이 세간에 가장 잘 알려진 계기는 2007년 서울중앙지검 3차장 시절 ‘BBK 의혹’ 수사를 지휘하면서부터였다. 도곡동 땅 및 BBK 의혹에 대한 수사는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였던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생명이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만큼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수사를 지휘한 김 부장은 이 대통령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려 당시 여당으로부터 ‘정치검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9년 8월 김 부장은 중수부장으로 전격 발탁되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중수부는 ‘박연차 게이트’ 수사 도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는 전무후무한 사태가 벌어져 ‘존폐론’ 논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의 중수부장 발령은 60여 년 검찰사에서 획기적인 일로 기록될 만한 일로 회자됐다. 그 이유는 김 부장이 소위 말하는 비주류 대학인 충남대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검찰사를 통틀어 지방대 출신 검사장은 그를 포함해 8명뿐이었으며 지방대 출신으로 중수부장 자리에 오른 인물은 1987년 김경회 전 부산고검장(부산대)이 유일했다.
서울대와 고려대 출신이 독식해왔던 대검 중수부장 자리에 지방대 출신 검사가 오른 것은 22년 만의 일로 김 부장의 중수부장 발령은 그만큼 획기적이고도 센세이션한 일이었다.
검찰 내에서 김 부장은 강단 있고 뚝심 있는 수사로 정평이 나있다. 특히 수사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는 원칙주의자로, 수사 진행사항에 대해서는 그 어떤 질문에도 입에 자물쇠를 채우는 것으로 유명하다. 강력통답게 검찰 내에서도 강골로 통하는 김 부장이지만 평소 성격은 호탕하고 시원시원하다. 특히 합리적인 리더십과 따뜻한 인간미, 매사 정확하고 빈틈없는 업무처리 능력으로 인해 선후배들에게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다. 가까이 지내는 동료와 후배들은 ‘항일투사’ 김홍일 장군과 동명인 그를 ‘장군님’이라 부르기도 한다.
탄탄한 집안배경과 학연·지연이 출세의 기본적인 조건으로 인식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이렇다할 백그라운드도 없는 김 부장이 검찰 요직을 두루 거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실력과 우직함,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바탕이 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실제로 김 부장은 상당히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김 부장은 충남 예산에서 2남2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를,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결국 그는 18세 때부터 지독히 가난한 집안의 가장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가난보다 더한 고통은 부모의 부재였다. 그것에 비하면 삼복더위와 엄동설한은 견뎌낼 만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가난은 그의 학업조차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지독했다. 임성중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예산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가정 형편상 학업을 지속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당시 김 부장을 도와준 인물이 백승탁 전 충남교육감이었다. 당시 예산고 교장이었던 백 전 교육감은 김 부장이 장학금을 받고 교장 사택에 기거하며 숙식을 해결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고, 그 덕분에 그는 고교를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고교를 마친 후에도 시련은 계속됐다. 예산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김 부장은 학업을 잠시 미루고 생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3년 동안 농사를 짓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었고, 1975년에서야 충남대 법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서울 유학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남달리 힘든 시기를 겪어냈기 때문일까. 검찰 내에서 그는 “어떤 난관에 봉착해도 서두르거나 동요하는 법이 없다. 일체의 흔들림없이 결국은 상황을 장악해버린다”는 평을 듣곤 한다.
당시 어려운 상황에 대해 김 부장은 “나는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쪽 문이 열린다는 것을 믿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삶을 포기할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특히 그는 지난 시련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자신과 동생들을 향한 주변의 따뜻한 손길에 대해 언급하며 감사의 말도 잊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 부장은 부인 조광자 씨와의 사이에 3녀를 뒀다. 고시준비 무렵 친구 소개로 만난 조 씨와는 고시에 합격하던 82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당시 김 부장의 주변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을 만류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갖은 고생하며 힘들게 살지 않았냐. 고시에 합격했으니 너를 서포트해 줄 수 있는 돈 많은 집 딸과 결혼해라”는 조언이었다. 하지만 김 부장은 “내가 고시 합격했다는 것 말고 내세울 게 뭐가 있냐”며 사랑을 택했다고 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김 부장은 대전 판·검사 가톨릭 교우회 회장을 맡고 있다.
한화·태광 수사 남기춘 서부지검장
한화그룹에 이어 태광그룹의 비자금조성 및 정·관계 로비의혹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남기춘 서부지검장(51)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수사대상 기업이 ‘단단히 잘못 걸렸다’며 잔뜩 움츠리고 있는 이유도 그간 남 지검장이 보여준 저돌적이고도 성역 없는 수사방식과 무관치 않다. 오죽하면 재계 일각에서는 “남 지검장이 있는 서부지검에 배당된 한화와 태광은 지독하게도 운이 없다”는 소리까지 나돌고 있다.
1960년 서울에서 출생한 남 지검장은 서울법대 출신으로 25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지청과 수원지검, 대구고검, 청주지청 부장검사, 부산지검 마약수사부장, 인천지검 형사 제4부장검사, 대검 중수부 제1과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 제2부장 검사를 거쳤다. 서울지검 강력부 시절에는 조양은 등 조폭 수사에도 개가를 올리며 조폭들 사이에서 ‘독종’ ‘저승사자’로 통했다. 얼마나 혈기왕성한 기질을 내뿜었던지 영화 <넘버3>에 나오는 검사의 모델이 남 지검장이라는 얘기도 있다.
강력부와 특수부, 중수부 등을 거친 남 지검장은 특수수사통으로 정평이 나있다. 여·야와 기업을 막론하고 한번 물면 놓지 않을 정도로 기본에 충실한 원칙주의자다. 남 지검장은 검찰 내부에서도 손꼽히는 강골로 평가된다. 당장 눈앞의 출세에 연연하지 않고 ‘정도’를 따르며 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하다.
특히 2003~2004년 대선자금 수사 때는 그의 꼿꼿한 성격과 원칙주의 수사방식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오죽하면 안대희 당시 대검 중수부장이 “대선자금 수사가 성공한 것은 남기춘 검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2003년 대검 중수부 1과장으로 재직당시 현대 비자금 사건을 수사했던 그는 전·현직 여·야 의원 등 20명이 넘는 정치인과 10명이 넘는 기업인들을 무더기로 기소하는 기염을 토하며 ‘독종 검사’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냈다. 또 그는 삼성 구조본부의 압수수색과 이학수 부회장의 구속수사를 주장했으나 검찰 수뇌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삼성그룹 고위인사 구속을 두고 남 지검장이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과 목소리를 높였다는 얘기도 있다.
대선자금 수사 때는 연일 조사실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해 몸무게가 10㎏나 불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사건을 맡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온통 사건에만 집중하는 그의 성격 탓이었다. 또 남 지검장에게 조사를 받고 돌아간 정치인들의 뒷얘기로 인해 정치권에서는 “남기춘이한테 걸리면 죽는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대선자금 수사과정에서 살아있는 권력으로 불리던 노무현 캠프에 대한 강도 있는 수사 역시 그의 성격을 잘 드러냈다. 당시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 충남지사와 여택수 청와대 전 행정관까지 재판에 넘기는가 하면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을 구속하는 ‘배짱’을 보였다.
중앙지검 특수2부장이었던 2005년에는 당시 실세였던 김희선 열린우리당 의원을 수사했고, 한직인 대전지검 서산지청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문석호 전 의원의 정치자금을 파헤치는 등 거침없는 수사를 펼쳤다. 이 때문일까. 남 지검장은 적잖은 마음고생을 감수해야 했다. 서산시 공무원의 당비대납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문석호 전 의원의 서산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남 지검장은 문 전 의원으로부터 “공권력을 남용한 불법 압수수색”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집권여당으로부터도 “보복을 일삼는 조직폭력배와도 같은 검찰”이라는 집중포화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여권의 맹공에 대해 남 지검장은 의연했다. 그는 연일 계속되는 여권의 비난에도 “여당의 공세로 사건의 본질을 흐려서는 안 된다. 힘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수사하지 않으면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고, 국민은 그런 검찰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남 지검장을 잘 아는 이들은 그를 종종 <삼국지>의 ‘장비’에 비유한다. 그다지 세련되지 못한 외모와 거침없고 좌고우면하지 않는 ‘돌격형’ 수사방식이 장비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매사에 요령을 부릴 줄 모르는 성격으로 인해 실력에 비해 요직 진출이 늦었다는 평가도 있는데 DJ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 일체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인해 한직으로만 돌았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그의 꼬장꼬장함을 최고의 매력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실제로 남 지검장 주변에는 그의 강성기질을 염려하면서도 진심으로 따르는 이들이 유독 많다. 삼성 법무팀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을 생각한다>는 책에서 삼성의 뇌물을 거부한 검사 중 한 명으로 남 지검장을 꼽기도 했다. 또 2004년 대선자금 수사팀장이었던 안대희 당시 중수부장이 “남기춘 같은 애들을 챙겨야 해서 내가 검찰을 못 떠난다”고 말했던 일화는 지금도 검찰 주변에서 회자되고 있다.
남 지검장의 저돌적이고 거침없는 수사방식에 대해 호평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거침없는 수사방식은 때로는 무리한 수사라는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했으며, 실제로 그가 기소한 일부 사건은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2003년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현대 비자금 150억 원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되어 1심과 2심에서 실형을 받았지만 2006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하지만 지난해 8월 울산지검장으로 부임한 남 지검장은 “아직도 유죄라는 생각은 변함없다”며 당시 사건담당 검사로서의 소신을 굽히지 않아 주목을 받았다.
2006년 대전지검 서산지청장에서 청주지검 차장검사로 자리를 옮길 당시 가진 이임식에서 남 지검장은 만해 한용운 시인의 작품 중 하나인 ‘떠날 때의 님의 얼굴’을 낭송한 바 있다.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못 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
당시 보복수사라는 여권의 맹공에 직면해 있던 상황에서 남 지검장이 특별히 만해의 시를 골라 낭송한 것을 두고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저항정신을 은연중에 표출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