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우슈비츠’로 불리는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가해자에 대한 재판이 32년 만에 다시 열렸으나 법리적 이유로 끝내 과거의 무죄 판결을 뒤집지 못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예상하지 못한 판결에 당황하며 눈물을 흘렸다.
지난 11일 오전 10시 45분쯤 대법원 선고가 끝나고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항의를 하다 방호원들에게 쫓겨나고 있다. 사진=최희주 기자
지난 3월 11일 서초동 대법원 2부에서 고 박인근 부산 형제복지원 원장의 ‘특수감금 혐의 무죄’에 대한 비상상고 선고가 있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국가폭력 사건으로 국가의 비호 아래 1975~1987년 부랑자 수용을 명목으로 무고한 시민들을 불법 감금, 강제노역, 성폭행, 암매장까지 한 사건이다.
원장 박 씨는 1987년 형제복지원의 울주작업장에 원생들을 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키는 등 특수감금과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됐지만 그를 단죄하기는 쉽지 않았다. 1심과 2심에서 ‘유죄 혹은 일부 유죄’로 판단된 것도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되기만 두 번이었다. 박 씨는 2년간 총 7번의 재판을 거쳐 1989년 업무상 횡령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 특수감금에 대해서는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문무일 전 검찰총장이 2018년 대검찰청 산하 검찰개혁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이 사건을 비상상고하면서 32년 만에 재판이 다시 열리게 됐다.
선고 예정 시간은 오전 10시 10분. 통상적으로 대법원은 여러 개의 사건을 묶어 한꺼번에 선고한다. 11일 선고가 예정된 사건은 형제복지원 사건을 포함해 총 8건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나머지 7건의 사건 관련자들과 함께 법정에 들어가 판결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날 형제복지원 사건은 따로 입장하는 것으로 결정돼 10시 30분쯤 선고됐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피해자 20여 명과 시민단체 관계자, 그리고 기자들까지 40여 명이 들어선 법정은 조용했다. 침묵에는 보이지 않는 기대감이 깔려있었다. 대법원 건물에 들어서기 전 일부 피해자들은 “비상상고가 인용된다고 끝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했고, 일부 기자들은 피해자들에게 “비상상고가 인용된다면”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질문을 하고 답을 받아갔다. 이처럼 당시 분위기는 당연히 비상상고가 인용된다는 것이었다.
조용한 법정이 다시 시끄러워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10시 30분쯤 들어온 4명의 대법관이 짤막한 인사를 하고 뒤이어 판결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비상상고 신청의 이유 등을 설명하던 대법관의 입에서 ‘기각’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곳곳에서 “에잇!”과 “아”와 같은 탄식이 터졌다. 2020년 10월 공판에서 참고인으로 출석한 박준영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피해자들을 진정시켰다. 대법관은 “차분히 들어 달라”며 다시 판결문을 낭독했다.
대법원은 법리적 사유를 들어 “비상상고를 인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원판결 법원이 박 씨의 특수감금 혐의에 무죄를 선고하면서 적용한 법령은 내무부 훈령이 아니라 정당행위에 관한 형법 제20조다. 내무부 훈령은 적용의 전제로 삼은 여러 사실 중 하나일 뿐”이라며 “해당 재판을 비상상고 요건인 ‘심판이 법령에 위반한 때’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즉 비상상고를 하기 위해서는 ‘법령 위반’이라는 요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검찰이 비상상고의 이유로 제시한 ‘훈령의 무효’에서의 ‘훈령’은 법령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상급심의 파기 판결로 효력을 상실한 재판은 비상상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도 기각 사유로 제시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이 과거 군사정권의 피해자임은 분명히 했다. 재판부는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국가가 건전한 도시질서를 확립한다는 기조 아래 부랑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인권유린이 행해졌다”며 “형제복지원의 보호라는 이름 아래 폭력이 동반된 감금과 노동력 착취를 국가가 묵인하고 비호했다. 이러한 상황을 살피지 않고 박 씨의 특수감금죄 여부만 단편적으로 논의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사건의 성격과 인권침해의 정도를 고려할 때 피해자들에게 어떤 특별한 권리를 창설해서 줄 것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를 돌려줄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2020년 12월 출범한 ‘2기 진실화해과거사정리위원회’를 언급했다. 재판부는 “뒤늦게나마 피해 회복의 근거를 마련한 것”이라며 “더 구체화된 피해회복 조치가 취해지고 피해자들의 아픔이 치유돼 사회 통합이 실현되기를 기대한다”고 위로했다.
약 10분간의 판결문 낭독이 끝나고 잠시나마 진정되었던 피해자들은 재판부가 다시 최종 기각을 선고하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 피해자는 퇴정하는 재판부에 다급히 “재판장님, 질문 있습니다!”라고 반복해 외쳤다. 법원 방호원들이 그를 제지하자 “왜 질문을 받지 않냐”며 울음을 터뜨렸다.
“국가가 우리를 잡아들였다. 국가가 이 문제를 시작했으니, 그 끝도 국가가 책임져 달라는 거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이렇게 판결해 놓고 질문 한 마디 못하고 그냥 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냐.”
그러자 반대편에 있던 또 다른 피해자도 “이게 무슨 판결이야?” “30년 전에도 똑같은 말을 했어!”라고 소리를 지르다 끌려 나갔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오늘은 될 줄 알았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오랜 시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 하는 피해자도 있었다. 방호원들은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며 항의하는 피해자들의 모습을 비디오카메라로 채증했다.
박준영 변호사는 “형제복지원 비상상고 기각 결정은 아쉽지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문상현 기자
선고가 끝난 10시 45분쯤 박준영 변호사와 피해자들이 다시 법원 건물 앞에 모였다. 피해자 일부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일부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박 변호사는 “판결에 이유가 있다. 방법도 있다”며 이들을 위로했다.
박 변호사는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 중대한 불법을 저지른 사람의 무죄 판결을 바로잡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의롭지 못한 것은 맞다.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절차와 방식이라는 것도 법에 규정되어 있는 것”이라며 “오늘 대법원은 국가의 조직적인 불법행위를 인정했다. 이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소멸시효가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그런 사례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대법원 판단은 앞으로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 도움이 됐으면 됐지 장애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헀다.
대법원이 피해자 명예훼손과 인권침해에 대한 회복의 몫을 진실화해위에 넘긴 만큼 진실화해위의 책임은 더욱 막중해졌다.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대표는 “오늘 재판은 박 씨의 과거 재판의 법리적 해석에 따른 기각 결정이었을 뿐 재판부가 피해당사자들의 억울함을 외면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진실화해위가 국가폭력, 인권침해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 억울함을 풀어 가면 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만 손해배상 청구에 대해서는 “먼저 사건의 진상을 규명한 이후 논의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벌써부터…”라고 말을 줄였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국가손해배상을 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처럼 비춰질까 염려한 듯 보였다. 그러면서 “손해배상 청구는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하면 된다. 하지만 철저한 조사가 우선”이라고 재차 말했다.
11일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자모임 대표가 대법원 판결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 있다. 사진=문상현 기자
2020년 10월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형제복지원 실태를 알렸던 피해자 강신우 씨도 선고 직후 “마지막 희망이었는데”라며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법리적 한계가 있었다는 부분은 이해한다”고 말했다(관련기사 “교도소와 군대 합친 동물의 왕국” 형제복지원 생존자 33년 만의 증언).
강 씨는 “결과는 안타깝지만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판결은 박 씨의 특수감금행위만을 다룬 것이었다.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났던 사건 전체에 대한 무죄를 판단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시작이다. 우리는 아직 피해자로서 조사를 받은 적이 한번도 없다”고 말했다.
12년 동안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인원은 약 3만 8000명에 달한다. 이곳에서 사망한 인원은 복지원 자체 기록으로만 최소 513명이다.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 지 30여 년이 흘렀지만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