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전 총장 최측근, 그리고 멘토 그룹들은 “다 계획이 있었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심층 기획형’ 출마라는 얘기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윤풍(尹風)은 태풍이 될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관측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3월 4일 사퇴를 표명하고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을 나서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분노 폭발형 출마?
윤석열 전 총장은 문재인 정부 들어와 승승장구하며 서울중앙지검장-검찰총장을 지냈다. 그러나 검찰총장에 임명된 직후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 일가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이며 집권세력과 심각한 갈등 양상을 빚기 시작했다. 윤 전 총장을 향해 여권의 융단 폭격이 쏟아졌다.
“화가 잔뜩 나서 나온 거지 뭐 다른 것이 있겠어요. 문재인 정부 들어와 파격 승진을 하다가 본인의 업무 자세로 인해 여러 질책을 받으니까 특정 수사에 대해 과도하게 검찰권을 행사하면서 맞섰고, 그게 또 제대로 안 먹히니까 열 받아서 옷 벗고 정치하겠다는 것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한 의원은 윤 전 총장이 ‘홧김에 출마했다’고 단언했다.
‘분노 출마’라는 여당 의원 말이 맞다면, 역대 제3지대 대선후보 중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윤 전 총장을 비교해볼 수 있다.
1987년 명예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던 정주영 명예회장은 1992년 말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여당 김영삼 후보, 야당 김대중 후보 등과 함께 출마했다. 어렸을 적부터 꿈이 대통령이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정 명예회장은 기업인을 함부로 대하는 집권세력 전횡에 불만을 가져왔다는 것이 정치권의 일반적 해석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청와대 본관 건축과정에서 정 명예회장 불만이 분노로 커지고, 대선 출마까지 이르게 만든 도화선이라는 해석이 있다. 노태우 정부 말기 현대건설은 청와대 본관 신축 공사를 맡게 됐는데 여러 차례 설계변경이 이뤄지는 등의 고비용 공사였지만 추가된 공사비 지급을 청와대가 제대로 해주지 않아 ‘정부가 기업에 이럴 수 있느냐’는 저항 심리가 발동했다는 게 노장 정치인들의 회고다.
대한민국 산업역사의 또 다른 한 축이었던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도 ‘분노 출마’를 계획한 바 있다. 이 회장 자서전 ‘호암자전’을 보면 1960년대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이 회장은 기업인이라는 이유로 여러 차례 부정축재자로 몰렸고, 그는 분통이 터져 기업인을 대하는 풍토를 바꾸려고 정치 입문을 결심했다. 하지만 여러 임직원들의 생계가 걸려 있는 삼성의 존망 위기를 염려해 결국 참았다고 전했다.
이병철 회장은 정치를 포기했지만 정주영 명예회장은 대선 출마를 강행했고, 여당 후보로 나온 김영삼 후보에게 큰 표 차로 낙선했다. 이어 김영삼 정부 하에서 현대그룹은 유형무형의 큰 어려움을 겪었고 ‘분노형 출마’의 끝은 결국 비극이라는 선례를 우리 정치사에 남겼다. 검찰 출신 국민의힘 한 전직 국회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윤 전 총장은 경솔한 성격이 아니다. 잽싸게 움직이는 것보다 그의 체형처럼 굼뜨지만 제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성마른 성격이라면 조국 전 장관 수사를 둘러싸고 집권세력과 첫 대결을 벌였을 때 화가 나서 옷을 벗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1년도 훨씬 넘게 집권세력과 긴 싸움을 벌이지 않았느냐. 분노가 폭발해 출마했다고 보기에는 화를 너무 오래 참았다.”
#시류 편승형 출마?
대선이 임박하면 일어나는 독특한 사회현상 중 하나는 종전까지 존재감이 크지 않았던 특정 인물이 주목받는 주자로 떠오르는 것이다. 윤석열 전 총장이 ‘뜨는’ 이유를 촛불 정부 아래에서도 여전히 목마름을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정의와 공정에 대한 국민적 요구라는 풀이도 있다.
선거 즈음의 시대적 요구, 그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국민적 열기가 새로운 정치 수요로 연결됐던 대표적인 대선 주자는 2002년 대선의 정몽준 당시 2002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장이 있다.
한국 축구대표팀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월드컵 4강 신화를 일궈냈고, 전 국민은 거리로 나가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쳤다. 동시에 IMF 외환위기 이후 허탈감에 빠져 있던 국민들은 ‘하면 된다’는 동기부여를 했고, 월드컵을 기점으로 새로운 경제 도약에 대한 기대감이 가졌다.
이러한 바람을 제대로 탄 것이 정몽준 위원장이었다. 그는 월드컵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기성 정치에 대한 실망과 불신으로 인해 발생한 부동층을 움직이면서 세찬 바람을 만들어냈다.
정 위원장은 1987년 제도적 민주화 체제 이후 대선에 등장했던 김종필-정주영-박찬종-이인제 등 제3후보들과는 전혀 다른 세몰이를 했다. 2002년 월드컵 성공적 개최 발판에 기업인으로서의 모습까지 각인되면서 지지율은 고공행진 했고, 여당 노무현, 제1야당 이회창의 강력한 라이벌로 급부상했다.
잘 되려고 하니 받쳐주는 것이 많았다. 인터넷 대중화 바람으로 정치에 무관심하던 젊은이들도 월드컵과 연관된 정 위원장에게 큰 관심을 보였고, 인터넷은 기성 언론이 가벼이 여기기 쉬운 제3후보의 이름을 퍼 날랐다.
여당인 민주당은 정 위원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민주당은 보수 진영에 이회창 후보가 버티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국민경선을 통해 뽑은 자당의 노무현 후보와 제3지대 정몽준 위원장과의 극적인 단일화 드라마를 목표로 전략적 대선 레이스를 운영했다. 결국 자당의 노무현 후보를 당선시키는 성과를 이뤄냈다. 결과적으로 보면 제3지대 후보 정 위원장은 정당 후보를 끝내 이기지 못한 채 불쏘시개에 만족해야 했다.
“2002 월드컵이라는 이벤트는 열기가 컸지만 지속성은 약했다. 축제를 1년 내내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특정 시류에 편승하다보면 반짝 인기는 있지만 롱런이 어렵다. 지금 대선이 1년이나 남았다. 윤 전 총장이 지금의 시류만 본다면 표를 모을 수 있겠지만 정치판 상황은 내일을 모르는데 1년 후를 어찌 알겠나. 검찰에서 보여준 정의와 공정 이미지 외에 다른 것이 윤 전 총장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다면 모를까, 지금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대선 레이스가 어림없을 것이다. 윤 전 총장도 이를 잘 알 것이다.” 2002년 대선을 기억하는 민주당 한 당직자는 이렇게 해석했다.
2002년 12월 대선 당시 대전 중구 서대문광장에서 열린 거리유세에 나선 노무현 당시 후보(왼쪽)와 정몽준 위원장. 사진=연합뉴스
#다 계획이 있었다?
윤석열 전 총장은 사람 만나는 것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소 구설에 오르더라도 만나서 의견을 듣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윤 전 총장이 최근 총장직 사퇴를 전후해 했던 언론 인터뷰, ‘보수의 심장’ 대구행, 여러 공격성 발언 등이 모두 꼼꼼하게 준비된 순차적 행동이었다는 말이 나온다. 여러 의견을 듣고 난 뒤 이뤄진 배움과 고민의 산물이라는 얘기다.
윤 전 총장 사퇴 이후 그를 만난 사람들도 “다 계획이 있었구나”라는 말을 쏟아냈다고 한다. 그가 집권세력과 갈등을 빚는 긴 기간 동안 여러 가지를 생각했고, 최종 결론은 도피가 아닌 도전이며 그 도전을 실행하는 순간이 바로 집권세력의 중대범죄수사청 입법 시도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최근 그를 만난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자유로운 몸이 된 윤 전 총장은 당분간 정치권과 거리를 두면서 여권이 밀어붙이고 있는 중대범죄수사청법 설치 반대운동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부터 공정의 가치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런 이유로 그는 선택적 메시지를 내고 있다. 그는 ‘LH 사태’에 대해 언론 인터뷰를 했다. LH 사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권력이나 돈을 가진 사람들의 부패, 그리고 그들이 난관을 만날 때마다 보이는 유전무죄 시도를 국민 앞에 낱낱이 고발하면서, 정권과 금권으로부터 독립된 수사기관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행보에 나설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윤 전 총장과 오래 알고 지낸 검찰 원로인사에 따르면 윤 전 총장은 정의를 확보해 국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검찰을 지키기 위한 행보에 일단 집중할 방침이다. 이어 정치적 역량을 키우는 과정에서 잔 펀치를 피하기 위해 당분간은 정치권과 거리를 두는 방식을 선택할 것으로 알려졌다. 코로나19 방역상황을 고려하면 자신의 SNS를 통한 소신 피력이나 선별적으로 언론과의 인터뷰를 할 것으로 전해졌다.
윤 전 총장은 중대범죄수사청 설치에 따른 검찰 무력화, 이에 대한 대응방안 등에 상당한 공부가 돼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윤 전 총장 본인이 전직 대통령 2명과 국가정보원장은 물론, 재벌 총수까지 수사하면서 느낀 검찰 독립의 필요성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며 국민에게 직접 설득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면승부에 대한 결기도 느껴진다는 것이 측근들의 얘기다. “한 6개월 정도 외국에 나가 있으면서 바람도 쐬고 견문도 좀 넓히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검찰 색깔’도 확 빠지고 앞으로 정치 행보를 하기에도 좋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있었지만, 윤 전 총장이 “그렇게 한가한 때가 아니다”라고 단번에 일축했다고 한다.
대구에 지역구를 둔 국민의힘 의원은 “그의 행동을 보면 여러 멘토들을 통해 받은 다량의 정보를 통해 준비된 것으로 확신한다. 싸우는 능력이 고건 전 총리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는 완전히 다르니 그들과 비교할 수도 없다”며 그가 무난하게 대권 본선 링에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강민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