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생명은 사상 최초 정규리그 4위팀의 챔피언결정전 우승이라는 새 역사를 썼다. 사진=연합뉴스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양팀 모두 우승이 어려운 ‘언더도그’로 평가받던 팀이었다. 특히 삼성생명은 정규리그 4위로 포스트시즌을 시작했다.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우리은행을 꺾고 챔피언결정전에선 KB국민은행에 승리했다. 역사상 최초 4위팀 우승이다. 삼성생명은 4강 플레이오프에서 정규리그 1위 우리은행을 잡는 이변을 연출했다. 그럼에도 챔피언결정전에서 삼성생명의 승리를 예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대다수 전문가들이 KB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시즌은 KB가 위력을 발휘할 기회로 전망됐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외국인 선수 선발을 하지 않은 시즌이어서 국가대표 빅맨 박지수의 존재감은 절대적이었다. 독보적인 높이와 기량을 보유한 박지수의 존재는 KB 쪽으로 승부의 추를 기울게 했다. 박지수는 정규리그에서 평균 득점 22.33(1위) 리바운드 15.23(1위) 블록 2.5(1위) 등 압도적 성적을 냈다. 어시스트(9위), 자유투 성공률(11위) 등에서도 준수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우리은행을 꺾은 삼성생명은 1, 2차전 2연승으로 기세를 올렸다. 2차전 승리는 극적이었다. 3쿼터 한때 10점차 이상 리드를 내줬지만 4쿼터 집념의 추격 끝에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 연장에서도 리드를 잡지 못했지만 마지막 순간 김한별의 결승 득점으로 승리를 가져갔다. KB의 우승을 낙관했던 예측들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GS칼텍스의 우승도 예상을 벗어난 결과였다. 이번 시즌 V리그 여자부의 화두는 흥국생명의 전력이었다. 흥국생명은 FA(자유계약) 시장에서 에이스 이재영과 재계약을 맺었고 현대건설의 이다영을 불러들였다. 국가대표 레프트와 세터를 동시에 보유하게 된 것이다. 월드스타 김연경의 복귀까지 이뤄지며 막강한 전력을 갖추었다. 모두 흥국생명의 우승을 예상했다. ‘단 1패도 기록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GS칼텍스는 V리그 개막 전 KOVO컵에서 이미 이변을 연출했다. 세트스코어 3-0 셧아웃 승리를 거듭하던 흥국생명을 KOVO컵 결승에서 3-0으로 격파하고 우승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V리그 우승은 흥국생명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만큼 흥국생명은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으며 오히려 컵대회 패배가 ‘좋은 약’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실제로 V리그 정규리그에서 흥국생명은 막강함을 자랑했다. 2라운드까지 전승으로 리그 1위를 독주했다. 차분하게 흥국생명을 추격하던 GS칼텍스는 시즌 후반기 흥국생명이 흔들리는 사이 6연승을 내달리며 순위를 뒤집어냈다. 16일 현재 최종전을 남겨둔 상황에서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선수시절 오랜 백업생활을 경험한 차상현 감독은 지도자가 된 이후 ‘토털 배구’를 선보여 주목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과정이 건강한 우승’ 찬사
겨울 스포츠가 과거에 비해 팬들의 외면을 받은 이유 중 하나로 ‘몰빵’이 꼽힌다. 외국인 선수 또는 ‘에이스’로 불리는 한두 명에게 팀의 비중이 집중된 경기 운영이 질타를 받은 것이다. 이는 저변이 넓지 않은 국내 여성 스포츠 현실 탓이기도 했다. 이번 봄, 각각 우승을 차지한 삼성생명과 GS칼텍스는 달랐다. 이들은 각각 토털 농구, 토털 배구를 추구하며 과정과 결과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근배 삼성생명 감독의 정규리그 후반기 운영은 지켜보는 이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최소 4위를 확보했다지만 승수 쌓기에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임 감독은 선수 운용 폭을 늘리고 주전 선수들의 출전 시간이 줄이면서 패배하는 경기가 많았다. 시즌 막판 4연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임근배 감독의 전략은 체력 안배라는 이점으로 돌아왔고 4강 플레이오프와 챔피언결정전에서 우리은행과 KB를 잡아내는 업셋을 연출했다. 4강에서 2승으로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한 KB와 달리 2승 1패로 한 경기를 더 치렀음에도 체력적 열세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정규리그에서 경험치를 쌓은 어린 선수들이 포스트시즌에서 힘을 보태는 결과를 낳았다.
우승 과정에서 특히 베테랑 김보미의 활약이 돋보였다. 정규시즌까지 김보미는 주전과 백업을 오가는 자원으로 활용됐다. 하지만 플레이오프부터 출전시간을 대폭 늘렸고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며 임근배 감독의 기대에 화답했다. 2점슛 성공률과 3점슛 성공률 모두 15%가량 끌어올렸고 평균 득점도 약 5점 늘었다. 수비에서도 만 35세라는 나이가 무색한 활동량과 적극성을 보였다.
GS칼텍스도 한 선수에게 의존적이지 않은 팀 기조를 이어갔다. 차상현 감독은 V리그 내 감독 중에서도 고른 선수기용을 하는 지도자로 꼽힌다. 차 감독의 선수 시절, ‘스타군단’ 삼성화재에서 백업 생활을 오래 했던 경험이 그 배경으로 작용한다.
많은 팀이 ‘몰빵 배구’ 탓에 크고 작은 부상을 호소했다. GS칼텍스도 비록 외국인 선수 러츠가 가장 많은 득점을 책임지긴 했으나 이소영(437점, 전체 10위), 강소휘(353점, 전체 12위)의 득점 분포도 고르다. 약점으로 꼽히던 센터 포지션에선 김유리, 문명화가 돌아가며 힘을 보탰다. 프로 3년 차 어린 선수인 문지윤도 중요한 전력으로 성장했다. 차상현 감독은 정규리그 우승 확정 이후 “웜업존 선수들의 성장이 우리의 위치를 만들었다”는 말을 남겼다.
‘원팀’으로 뭉친 팀 분위기도 돋보였다. 5라운드 초반 베테랑 김유리가 수훈선수로 선정돼 방송사 인터뷰에 나서자 차상현 감독 포함 모든 팀 구성원들이 모여 앉아 이를 지켜보는 모습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날 이후 GS칼텍스는 6승 1패를 기록하며 순위를 뒤집어냈다. 1위 자리를 내준 흥국생명이 ‘내분’으로 무너졌기에 GS칼텍스의 행보가 더욱 돋보였다.
임근배·차상현 감독은 각각 리그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우승에 더해 ‘건강한 과정’이라는 의미가 더해져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우승으로 화려하게 시즌을 마감한 삼성생명과 달리 GS칼텍스의 시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규리그 1위를 확정한 GS칼텍스는 16일 저녁 KGC인삼공사와 시즌 최종전을 치른 이후 챔피언결정전을 대비한다. 2, 3위 팀 간 플레이오프 승자와 만나는 챔피언결정전은 오는 26일 1차전이 시작된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