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레리나를 꿈꾸던 소녀가 무장 게릴라 요원을 거쳐 브라질 첫 여성 대통령에 당선됐다. 호세프 당선자에겐 ‘룰라(원안)의 후계자’라는 수식어가 정치인생의 약이자 독이 될 것으로 보인다. AP/연합뉴스 |
몇 년 전부터 남미에 불고 있는 ‘여풍’이 수그러들기는커녕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브라질의 철의 여인’ 지우마 호세프(62)의 대통령 당선은 전세계적으로 ‘마담 프레지던트’ 시대가 한 발짝 앞당겼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벌써부터 많은 전문가들과 외신들은 호세프가 국제무대에서 미칠 영향력과 파워를 점치면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보다 더 막강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물론 이런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다. 가장 큰 과제는 룰라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당선된 그녀가 과연 룰라 대통령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색깔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데 있다. “호세프를 뽑은 것이 아니라 룰라 대통령을 다시 뽑은 것”이라고 말하는 유권자들이 대다수인 것처럼 ‘룰라의 후계자’란 수식어는 그녀에게 약인 동시에 또한 독이기도 하다. 반정부 무장단체 요원에서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드라마 같은 그녀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 봤다.
브라질의 제40대 대통령이 된 호세프는 이로써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이어 남미에서는 세 번째,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전체에서는 일곱 번째 여성 대통령이 됐다. 현재 여성이 최고지도자로 있는 나라는 브라질을 포함해 독일, 핀란드, 아일랜드, 아르헨티나, 호주, 뉴질랜드, 방글라데시 등 모두 17개국이다.
집권 말기 레임덕은커녕 80%가 넘는 엄청난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룰라 대통령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일찍부터 낙승을 예상했지만 과정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우선 ‘이미지’가 문제였다. 젊은 시절 반정부 게릴라 단체에서 활동했던 과격한 여전사 이미지와 두 번의 이혼 경력은 보수적인 브라질 국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여기에다가 한 번도 선거를 통해 공직에 당선된 적이 없다는 점, 그리고 림프종 진단을 받고 두 차례에 걸쳐 대수술을 받았다는 점 등 건강 문제도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인생의 멘토이자 든든한 지원군인 룰라가 있었다. 룰라가 직접 나서서 그녀를 적극 지원하자 선거 초반 10%에 머물던 지지도는 금세 50%까지 치고 올라갔다. 선거 기간 동안 룰라는 호세프를 가리켜 ‘브라질의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추켜 세웠으며, 이런 ‘룰라 효과’는 선거 내내 이어졌다.
물론 그녀가 단순히 룰라의 도움으로만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 과감한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고, 이런 전략이 캠페인 과정에서 큰 효과를 봤다. 우선 호세프는 공격적인 이미지를 지우고 나라를 보살피는 ‘푸근한 이웃집 아줌마’로 변신하는 데 주력했다. 깐깐해 보일 수 있는 안경을 벗어 던지고 콘택트렌즈를 착용했으며, 흐트러진 짧은 단발머리를 아줌마풍의 단정한 커트 스타일로 바꾸었다.
심지어 성형수술까지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브라질 언론을 통해 처음 제기된 이런 의혹은 그녀가 2008년 12월 수석장관 시절 이미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코수술을 했다는 데서 시작됐다. 그리고 선거 기간 동안에도 이런 의혹은 끈질기게 불거졌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그녀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건강 문제에 관해서도 당당했다. 지난해 림프종 진단을 받았던 그녀는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솔직하게 밝혔고, 항암치료를 통해 90% 이상 완치될 수 있다며 후보직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뜻을 굳건히 했다. 치료 도중 한 차례 다리 근육의 염증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는 등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선거 기간 내내 그녀는 밝은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섰다. 방사선 치료 때문에 다 빠져 버린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해서 가발을 쓰고 다녔던 그녀는 한번은 카메라 앞에서 보란 듯이 가발을 벗어 던져 흔들어 보이는 등 솔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그녀의 노력과 정성 덕분에 차차 마음을 열기 시작한 브라질 국민들은 지난달 31일 마침내 그녀를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뽑았다. 비록 10월 3일 1차투표에서 46.91%의 득표율로 과반수표를 얻지 못해 결선투표까지 가긴 했지만 결선에서 제1야당인 사회민주당(PSDB)의 주제 세하 후보(68)를 12%포인트 차이로 제치고 압승을 거두었다.
이처럼 포기할 줄 모르는 그녀의 뚝심과 역전은 이번 선거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인생 자체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호세프는 1947년 브라질 중부의 벨로 오리존찌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정치적 탄압 때문에 고향인 불가리아를 등지고 브라질로 이민 온 변호사 겸 사업가였고 모친은 브라질 출신의 교사였다. 넓은 저택에서 하인 세 명을 두고 살았는가 하면, 피아노를 배우고 발레리나를 꿈꿨을 정도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상류층 자녀들이 모이는 사립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그녀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수녀 선생님들과 함께 도시의 빈민촌을 방문했을 때에는 중상류층과 빈곤층 사이에 놓인 어마어마한 간격을 체험하고 충격에 빠지기도 했으며, 자신의 집 앞에 찾아온 슬픈 눈을 한 거지 소년에게 지폐 한 장을 반으로 찢어서 건네면서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무렵부터였다. 16세 때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에밀 졸라와 도스토옙스키 책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됐다. 이를 통해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하게 된 그녀는 사립학교를 나와 공립학교로 전학을 갔으며,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권위주의에 심한 반감을 갖게 됐다. 이 무렵 나라가 처한 정치적 상황, 즉 군부독재의 실정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된 그녀는 군부에 저항하는 단체에 가입할 것을 마음 먹었다.
20세였던 1967년 처음으로 브라질 사회당의 급진분파인 노동자당(POLOP)에 가입했다가 얼마 후 무장투쟁 노선을 지향하는 ‘전국해방지휘본부(COLINA)’에 합류했으며, 이때 만난 다섯 살 연상의 동료이자 기자였던 클라우디오 갈레노와 결혼했다.
대학 시절 COLINA의 게릴라 요원으로 활동한 그녀는 무기를 손에 들고 직접 군부와 맞서 싸우는 대신 노동자들을 상대로 의식화 교육을 하거나 동료 대원들의 무기를 숨겨주거나 자금을 조달해주는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1970년 게릴라 요원들이 ‘혁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상파울루 주지사의 집에 침입해서 250만 달러(약 28억 원)가 든 금고를 훔친 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이로 인해 그녀는 3년 동안 교도소에 수감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다. 무려 22일 동안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견뎌내기도 했다. 선거 기간 동안 자신의 과거 무장투쟁에 대해 트집 잡는 야당에 대해서는 “우리는 보다 나은 브라질을 만들고자 하는 꿈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싸웠다”면서 자랑스러워했다.
감옥에서의 3년은 인생 최대의 전환점이 됐다. 수감 시절 경제학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경제학에 심취하게 된 그녀는 이 무렵 급진좌파에서 중도좌파로 방향을 선회하게 됐고, 출소 후에는 포르토 알레그레 연방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석방 후 첫 번째 남편과 이혼하고 변호사이자 게릴라 요원이었던 카를로스 아라조와 재혼해서 딸 파울라를 낳았다. 하지만 1994년 남편이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잠시 별거에 들어갔다가 2000년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
그녀가 처음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80년 민주노동당(PDT) 창당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처음에는 경제 자문 역할에 만족했던 그녀는 1985년 포르토 알레그레시 재무장관에 기용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 리우 그란데 도 술 주정부의 에너지장관으로 발탁되면서 자신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당시 그녀는 전력난으로 허덕이던 지역에 효과적인 해결책을 내놓아서 인정을 받았다. 전력이 부족해서 마음 놓고 전기를 쓰지 못하는 지역민들에게 “에너지를 절약하라”고 소리치는 대신 민간기업을 끌어들여 1000㎞에 달하는 전력선을 건설하거나 댐과 화력발전소를 건설하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전력난을 해소했다.
지방정부에서 착실하게 경력을 쌓던 그녀가 중앙정치무대로 나간 것은 2001년이었다. 2000년 PDT를 탈당한 후 이듬해 룰라가 창당한 노동자당(PT)에 입당한 그녀는 2002년 대선 당시 룰라 캠프에서 에너지 관련 자문 역할을 맡으면서 룰라의 대통령 당선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리고 이듬해 룰라 정부가 출범하면서 지방정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광산 및 에너지부 장관에 기용됐다. 에너지부 장관 시절 전력수급문제 해소 및 국영 석유기업인 ‘페트로브라스’의 성공적인 기업공개로 룰라의 신임을 얻었으며, 2005년에는 집권당 내 부패 스캔들로 탄핵 위기에 처했던 룰라를 전면에 나서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우리나라 총리직에 해당하는 수석장관에 임명됐다.
당시 위기를 극복한 덕분에 룰라는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으며, 호세프는 2010년 3월 노동자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지명되기 전까지 총리격인 수석장관을 지냈다.
수석장관 시절 내내 ‘강한 브라질’을 외쳤던 호세프는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와 함께 세계 3대 산유국으로 급부상한 브라질의 에너지 및 석유 산업의 성장을 강조하는 한편,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인프라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 경제를 급성장시키는 데 일조했다.
또한 대선 후보 시절 룰라 정부의 야심찬 정책인 ‘성장촉진프로그램(PAC)’, 즉 저소득층에 대한 주택공급 확대, 교통시스템 개선, 보건소 확대, 치안문제 개선 등에 8800억 달러(약 98조 원)를 투입하는 계획을 그대로 계승할 것을 약속하면서 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거대한 국토를 보유한 브라질의 지도자로서 앞으로 호세프에게 주어질 과제는 막중하다. ‘빈곤 해소’와 ‘경제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약속을 그녀가 과연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많다.
또한 비록 룰라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겠다고 밝혔지만 노동자계급 출신인 룰라와 달리 중상류층 가정에서 자란 그녀가 룰라만큼 대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 있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사실 룰라가 이뤄낸 어마어마한 성과는 후임자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룰라 정부 8년 동안 브라질은 중국과 더불어 세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연평균 5%가량의 고성장을 기록했으며, 1인당 평균 소득은 무려 23%나 증가했다. 또한 룰라 정부는 지난 8년 간 ‘볼사 파밀리아(빈민가정소득보조정책)’를 통해 2900만 명의 빈곤층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리면서 1999년 35%에 달했던 브라질의 극빈층 비율을 2007년 25.1%까지 낮추는 데 성공했다.
이를 의식한 호세프는 선거 당시 룰라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할 것을 재차 다짐했으며, 더불어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석유산업을 바탕으로 브라질의 지속적인 성장을 약속했다. 특히 정부가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산토스만 앞바다에 묻힌 최소 79억~최대 160억 배럴의 원유 및 천연가스를 개발함으로써 에너지 강국으로 급부상할 복안을 마련 중에 있다고도 말했다.
이런 다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룰라의 후광’을 얼마나 빨리 벗을지가 임기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믿고 있다. 실제 많은 유권자들이 “호세프를 뽑긴 했지만 앞으로 브라질을 이끌 지도자는 여전히 룰라라고 생각한다” “이제 룰라의 세 번째 임기가 시작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호세프보다는 여전히 룰라를 지지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까닭에 국정운영에 실패할 경우 2014년 대선에서 룰라에게 다시 정권을 넘겨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연 그녀가 안고 가되 동시에 넘어야 할 산이기도 한 룰라를 뛰어넘는 지도자가 될지, 아니면 룰라의 그늘에 묻힌 채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만 머무를지 호세프의 4년이 사뭇 기대된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 호세프는 대선캠페인 당시 안경을 벗고 단발머리를 단정한 커트로 바꾸는 등 이미지 변신 전략으로 효과를 봤다. 사진 왼쪽부터 1970년 체포 당시, 깐깐한 인상의 단발 시절, ‘푸근한 아줌마’로 변신한 모습. |
호세프에게 출생의 비밀이…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본적’ 놓고 수군
호세프가 브라질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소식에 덩달아 신이 난 것은 멀리 대서양 건너 불가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다름이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인 페드로 호세프가 불가리아의 이민자 출신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였던 페드로는 1900년 불가리아 중부의 가브로보에서 태어났다. 불가리아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노벨문학상 후보였던 여류 시인 엘리사베타 바그리아나와도 친분을 쌓은 바 있다.
하지만 1929년 공산주의자를 향한 탄압을 피해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으며, 이후 1940년대 브라질로 건너와 정착했다. 이후 브라질에서 부동산 사업가로 변신해 성공을 거두었고, 호세프의 어머니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호세프의 아버지는 그녀가 14세 되던 해 사망했다. 호세프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고향인 불가리아 땅을 밟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호세프는 불가리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나는 어느 정도는 불가리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나라인 불가리아에 대해 애정과 사랑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이와 관련 ‘페이스북’을 비롯한 몇몇 누리꾼들 사이에 엉뚱한 소문들이 떠돌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불가리아 고향 친척들의 말을 빌려 호세프의 아버지가 고향을 떠난 이유가 정치적 탄압이 아니라 사실은 다른 데 있었다고 주장했다. 엄청난 빚을 져서 쫓기듯 나라를 떠났던 것이며, 심지어 임신한 아내를 버리고 도망을 쳤다고도 한다. 또한 그는 불가리아에서 태어난 아들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고, 그 아들은 최근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페이스북’에는 호세프가 불가리아가 아닌 마케도니아 혈통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는 그룹도 생겨났다. ‘지우마 호세프는 마케도니아 사람이다’라는 이름의 이 그룹의 회원 수는 현재 54명이지만 현재 꾸준히 그 수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는 호세프의 조부모가 사실은 마케도니아에서 불가리아로 건너간 이민자들이란 사실 때문이다. 따라서 호세프도 당연히 마케도니아 후손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