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3월 4일 사퇴를 표명하고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을 나서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조기 등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사실상 정치에 뛰어든 이상 마운드에 빨리 올라 실전 피칭을 해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정치판은 맷집이 중요한데 연습투구만 하다가 실전 마운드에 등판했을 경우, 홈런도 아닌 내야안타 2~3개만 맞아도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연습과 실전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지난 대선에서 야심차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여실히 보여줬다. “정권교체가 아닌 정치를 교체하겠다”는 무게감 있는 담론을 내세우며 출사표를 던졌지만 반기문 전 총장은 불과 3주 만에 백기를 들었다.
반 전 총장은 자신을 향해 쏟아진 정치권 공격을 견디지 못했다. 공항철도를 타면서 1만 원짜리 두 장을 넣었다가 네티즌들로부터 호되게 당했고, 이를 언론이 연이어 받아쓰자 인내하지 못했다. 그는 오랜 세월을 외국에서 보낸 사람에게 들이대는 잣대로는 너무나 가혹했다고 하소연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그 사이 반 전 총장 지지율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한때 독보적인 1위를 달렸지만, 잇따른 펀치에 그의 지지율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급격한 하락세를 보였고,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윤 전 총장 조기 등판을 권유하는 이들은 지금이 마운드에 오를 ‘적기’라고 본다. 윤 전 총장이 각종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수위를 다툴 만큼 관심도가 높아진 데다,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국면에서 보수 야권 후보를 지원사격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보수진영을 결집시키는 구심점으로 자리할 수 있다는 논거다. 윤 전 총장이 보궐선거 국면에 등장할 경우 서울·부산시장 선거를 확실한 ‘정권 심판’ 선거로 몰아갈 수 있고, 정권에 대한 항의 세력을 투표장으로 유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당 내부에서도 윤석열 전 총장의 보궐선거 지원 사격을 기대하고 있다. 국민의힘 한 수도권 당협위원장은 “인위적으로 데뷔전 마운드를 만들 것이 아니라 이번 국면을 이용하는 것이 윤 전 총장에게는 유리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윤석열 전 총장은 아직까지는 조기 등판에 신중한 입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검찰 수사권 박탈로 인한 부패 범죄의 확산과 이로 인해 국민들이 입게 될 피해를 알리는 것이 우선적인 임무이며, 이 부분에 대한 진실을 분명하게 전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윤 전 총장이 조급하게 움직이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도 조기 등판 가능성을 낮춘다. 사법시험을 9번 본 끝에 합격했을 정도로 윤 전 총장은 인내력 있게 가는 스타일이지, 몸이 먼저 나가는 행동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조기 등판하면 실전 연습 기회는 주어지지만, 그만큼 조기 강판될 위험도 크다는 주변의 조언이 여전히 많다.
몸은 나타나지 않고 목소리만 내미는 전략을 보궐선거 국면에서 사용할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윤 전 총장은 최근 ‘LH 사태’에 대해 “이 나라 발전의 원동력은 공정한 경쟁이다. 공정해야 할 게임룰이 조작된 것”이라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또한 그는 기자들에게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직접 전화 걸어서 물으라”며 적극적 메시지 발신 의사를 드러내기도 했다.
#유니폼 색깔은?
윤 전 총장 주변에서는 일단 ‘빨간색’인 국민의힘 유니폼을 입으라는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 ‘정권 심판’을 내걸고 여당 후보와의 일대일 구도를 만들어야 내년 대선에서 승산이 있고, 그러기 위해선 조기에 국민의힘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정치에 입문했을 때 멘토 역할을 했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도 3월 17일 국민의힘 초선 의원 모임인 ‘명불허전 보수다’ 특강에 나가 국민의힘 입당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윤 전 장관은 “(국민의힘) 당 정체성이 께름칙하겠지만, 그렇다고 제3지대 세력을 만들 것인가. 큰 선거일수록 거대 정당의 하부 조직이 중요하다. 1∼2년 내 당을 만들어서 하는 건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윤 전 장관은 국민의힘의 성의 있는 조치도 촉구했다. 그는 “국민의힘이 (윤 전 총장을) 영입해야겠다면, 올 수 있는 여건과 상황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멍석을 잘 깔아주고, 모셔와야 한다는 논리다.
엄청난 선거 비용을 고려할 때 윤 전 총장은 제3지대 또는 독자 신당이 어렵고, 교섭단체급 원내정당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고려형 주장도 나온다. “무슨 돈으로 선거를 치를 것이냐”는 원칙적 질문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반기문 전 총장이 다시 소환된다. 정당 후보가 아닌 무소속 후보로 시작한 반 전 총장은 엄청난 선거 캠프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어했다는 전언이다.
대선 캠프에 몸담아봤던 한 국회의원은 “정치라는 것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밖에서는 돈 안 쓰는 깨끗한 선거를 외치지만, 막상 이 판에 들어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인력과 조직이 돌아간다. 사무실 임차, 업무용 자동차 및 인력 동원 등 현실적 측면에서 부딪히는 것들이 많다. 제3지대 후보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윤 전 총장에게 고민은 있다. 탄핵정당이라는 프레임이 여전히 남아있는 국민의힘에 들어갔다가, 실망감으로 인해 윤석열 바람이 잦아들 수 있다는 우려다.
이에 윤 전 총장이 신당을 만들 경우 국민의힘을 이탈해 윤석열 신당으로 향하는 의원들이 나오면서 사실상의 정계개편이 이뤄질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 경우 윤석열 신당이 교섭단체 정당으로 거듭나 자금 문제 등 선거판의 여러 제약 요건도 탈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한 현역 의원은 “보궐선거 결과에 따라, 그리고 윤 전 총장 지지율이 계속 고공행진 한다면 정계 개편 압력이 발생한다. 정치는 힘이 센 쪽으로 붙기 때문에 뚜렷한 리더가 없는 국민의힘에 원심력이 작용하면서 윤석열 신당이 힘을 받을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2017년 1월 인천공항에서 서울역으로 향하는 공항철도에 탑승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사진=고성준 기자
#빈수레 후보론
여권의 차기 대선주자 여론조사 지지율 선두주자인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윤 전 총장을 두고 “(윤 전 총장이) 보여준 콘텐츠라곤 수사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정치란 것이 종합예술적 측면이 강하고 넓게 볼 줄 알아야 하는데, 한 곳만 오래 판 사람의 시야는 좁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지사의 말처럼 ‘한방에 훅 가는’ 대선판에서 콘텐츠 부족은 장기 레이스 완주를 어렵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 당내 경선과 본선까지 긴 기간 동안 혹독한 언론 검증과 토론이 이어지는데, 공부 안 한 ‘빈수레 후보’는 버티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권 대권 잠룡으로 거론되는 이광재 민주당 의원도 3월 16일 강원도청을 찾은 자리에서 윤 전 총장에 대해 “정치를 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러면 행복할까요? 시대 과제를 이뤄낼 수 있을까요? 글쎄요”라며 부정적 시각을 보였다. 정부 여당을 공격하고 나간 검찰총장이라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할 이유가 당연히 없지만, 정치 베테랑인 이 의원으로서는 ‘저 실력으로는 끝이 뻔하다. 불행해진다’는 시각을 내비친 것으로 읽힌다.
대구·경북(TK)을 기반으로 수도권에서 인지도가 높은 대선주자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은 윤 전 총장에 대해 과거가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윤 전 총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수사한 박영수 특검에서 수사팀장을 했고, 박 전 대통령을 구속기소했다는 점에서 보수 지지층의 확고한 지지를 받기에 한계가 있다는 관측이었다. 국민의힘 한 TK의원의 분석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TK에서 80% 넘는 지지를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수도권으로 지지세를 확장해나갔다. 진보정당 후보도 호남에서 확실한 지지를 바탕으로 수도권으로 지지를 넓혀간다. 지금 윤 전 총장이 TK에서 50%대의 지지율이 나온다. 이 수치로는 안 된다. 결국 그가 보수의 심장에서 압도적 지지율을 올릴 수 있느냐가 핵심이고 이 밖에 ‘수사 말고도 나는 아는 것이 많다’는 꽉 찬 수레론을 들고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윤 전 총장도 TK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총장 퇴임 직전 대구를 찾아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며 TK 민심 잡기를 위한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전격 사면을 실시해, 출소한 박 전 대통령이 가시 돋친 발언을 하면 윤 전 총장 행보에 어떤 식으로든 장애물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목소리다.
강민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