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가 아프다. 21세기에 군부독재라니. 우리는 군부에 의해 함부로 짓밟히고 무시되고 억압되어도 좋은 존재들이 아니라고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는 미얀마 시민들을 보고 있다. 무자비하고 냉혹한 군부독재의 군홧발 아래 폭력적으로 세상을 떠난 무고한 시민들이 최소 183명이라는데,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내 가슴에 미얀마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로 각인되어 있다. 몇 년 전 나는 미얀마 양곤에 있는 수행센터에서 두 주일을 보냈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밤 9시까지 명상을 하는 일정이었다. 처음으로 접해보는 위파사나 수행법은 매혹적이었으나 쉽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졸리던지. 잠이 모자라지도 않고 평소 조는 습관이 있는 것도 아닌데 방석 위에서 나는 종종 졸았다. 졸음은 정말 달콤했다.
스르르 눈을 감고 있다 정신을 차리면 내 앞에서 언제나 졸고 있는 미얀마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여인만 보면 속웃음이 났다. 저렇게 허리가 구부러져 있으니 졸지, 그렇게 속참견을 하면서 나는 내 허리를 폈고, 그제야 졸음은 저만치 갔다. 서로 한 마디를 섞은 적이 없어도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도반이었던 것이다.
힘들기도 하고 지치기도 했던 시간이었으나, 지나고 보니 보물 같은 시간이었다. 내 호흡에 집중하고, 내 발걸음에 집중하고, 무질서하게 떠돌며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무수한 생각들을 대면하는 마음에 가닿으면서 마음이 스스로 질서 잡아가는 것을 본 것 같다. 그것은 밖으로 향하는 모든 시선을 안으로 거둬들이는 작업이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내면의 힘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내면의 힘이 없으면 아무리 잘나가도 소용이 없다. 불안 혹은 두려움에 휩싸여 전전긍긍 살아가게 된다. 우리에게 있으나 우리도 몰랐던 힘, 그 힘을 일깨우지 못하면 만물의 영장인 우리가 만물의 하인 노릇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하인의 눈으로 본 세상이 아니라 주인의 눈으로 본 세상을 살기 위해서도 그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자기를 믿고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생각들에 끌려 다니지 않고 그 생각들의 중심을 잡아가는 것이었으니.
거기선 밥 먹는 것까지 중요한 수행 과정이었다. 오후에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는 수행 공간이어서 하루 식사의 끝인 오전 11시의 점심공양은 중요했다. 그런데 그 공양은 언제나 누군가의 보시로 이루어졌다. 꼭꼭 씹어 먹는 일에 집중하며 그 누구도 말이 없는 엄숙한 공간 한 편엔 그날 보시를 한 사람과 그 식구들이 조용히 그들이 올린 공양을 먹고 수행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음식을 먹고 마음을 돌볼 수 있는 것은 기꺼이 보시를 한 누군가의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그 선한 사람들이 코로나 상황에도 매일매일 거리로 모여드는 것이다. 두려움 없이 온몸으로 군부에 맞서다 죽어가고 다쳐가는 사람들을 어찌 할까. 가난해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 존경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들,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그들이 분연히 일어났다면 그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미얀마 연방의회 대표위원회 유엔 특사인 사사의 인터뷰가 구체적이다. 그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와 군대가 국민을 위협하고 공격하고 있다며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누는 미얀마 군부에 무기를 팔지 말 것과 유엔 평화유지군이 들어와 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말대로 민주주의를 바라는 미얀마 국민의 염원을 폭력으로 꺾을 수는 없다. 민주화를 기원하는 시민들이 더 이상 희생되지 않기를 비는 마음과 마음을 모아야 할 것 같다. 하루바삐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한 국제사회의 중재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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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