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생 선수들은 여전히 KBO리그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들 중 오승환, 추신수, 이대호(왼쪽부터)는 2016년 공동저자로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당시 사인회를 열었던 장면. 사진=임준선 기자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던 1982년 일제히 세상의 빛을 본 선수들이 그랬다. 동기생들끼리 여러 차례 함께 태극마크를 달고 한국 야구의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KBO리그는 물론 미국과 일본 프로야구까지 누비면서 한 수 위 실력도 뽐냈다. 실력과 이름값은 물론 금전적으로도 가장 큰 성과를 올려 진정한 ‘골든 에이지’로 통한다.
이제 한국 나이로 마흔이 된 터라 일부는 은퇴하고 일부는 선수생활의 황혼기를 맞이했지만, KBO리그는 1982년생 선수들의 기량과 인기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2000년 애드먼턴에서 시작된 역사
‘82년생 친구들’의 역사는 그들이 고3이던 2000년 애드먼턴에서 시작됐다. 그해 8월 13일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제19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 한국이 연장 13회 접전 끝에 강호 미국을 9-7로 꺾고 우승을 확정한 순간, 마무리투수로 등판했던 부산고 추신수가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1루에 있던 천안북일고 김태균, 2루를 지키던 부산고 정근우, 3루에 있던 경남고 이대호가 힘차게 마운드로 달려와 얼싸안았다. 한국 프로야구의 태동과 함께 태어난 ‘출범둥이’들이 야구사에 이름을 아로새기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애드먼턴 키즈’로 불리면서 한국 야구의 미래를 상징하는 이름이 됐다.
극적인 우승이었다. 한때 한 제작사가 영화화를 검토했을 정도로 드라마틱했다. 아무도 고교 선수들의 국제대회에 주목하지 않던 시절, 이들은 열악한 지원을 감내하면서 캐나다로 날아갔다. 대표팀 사령탑이던 부산고 조성옥 감독을 중심으로 특급 기량을 가진 유망주들이 똘똘 뭉치자 기적이 일어났다. 근성과 투지, 열정과 우정을 앞세워 야구 강국 미국, 캐나다, 멕시코, 쿠바, 일본 등을 차례로 꺾었다. 미국과 펼친 연장 접전은 아직까지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역사에서 최고 명승부 중 하나로 기억될 정도다. 추신수는 대회 최우수선수(MVP)와 최우수 왼손투수로 선정돼 2관왕에 오르는 겹경사도 누렸다.
중심 타선을 책임진 추신수와 이대호의 남다른 인연도 화제를 모았다. 둘은 부산 수영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사이다. 야구부가 있는 수영초로 전학한 추신수는 덩치가 무척 컸던 같은 반 친구에게 “나랑 같이 야구하자”고 제안했다. 얼떨결에 야구부로 따라갔다가 눌러 앉게 된 그 친구가 바로 이대호다. 그때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던 ‘역사적 만남’이 이뤄진 셈이다. 그렇게 함께 공을 던지고 배트를 휘두르던 둘은 각기 다른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진학해 라이벌로 성장하다 청소년 대표팀에서 다시 같은 유니폼을 입었다.
1982년생 스타플레이어들의 존재가 더욱 값진 이유는 한국 야구가 국제대회에서 맹활약한 2000년대 후반, 성인 국가대표팀에 다시 모여 영광의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2008 베이징올림픽, 2009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국가대표의 중심축이 바로 1982년생들이었다. 국가대표팀의 세대교체를 자연스럽게 이루고 한국 야구의 위상을 높인 주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2009년 WBC 때는 이전까지 메이저리그(MLB) 일정상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 참가할 수 없었던 추신수가 처음으로 대표팀에 합류했다. 선수 구성에 유독 난항을 겪던 대회라 어렵게 합류한 추신수의 존재는 천군만마였다. 다만 추신수의 당시 소속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외야수로 출전할 수 있는 경기 수를 제한하고, 나머지 경기에는 지명타자로 나서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면서 작은 혼란이 생겼다. 추신수가 외야에 서고 김태균과 이대호가 1루수와 지명타자를 나눠 맡는 게 베스트 시나리오지만, 추신수가 지명타자로 나서면 김태균과 이대호 중 한 명이 포지션을 잃고 벤치에 앉아야 하기 때문이다.
셋 중 어느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던 대표팀 코칭스태프는 묘안을 짜내느라 고심을 거듭했다. 결국 중심타자 이대호가 국가대표팀 훈련에서 3루 수비를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이런 난관을 뚫고 ‘준우승’이라는 결과를 일궈내 더 값졌던 대회다.
#해외 리그까지 접수한 82년생 친구들
1982년생 동기들 중엔 해외 리그에서 활약한 선수가 4명이나 있다. 추신수, 이대호, 오승환, 김태균이다. 오승환은 애드먼턴 대회에 함께 출전하진 않았지만, 성인 국가대표팀을 함께 이끈 1982년생의 대표 주자다. 고교 졸업 후 단국대에 진학해 동기들보다 4년 늦게 프로에 뛰어들었다.
가장 먼저 바다를 건넌 건 추신수다. 그는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맹활약 덕에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고교 졸업 후 KBO리그에 입단하지 않고 곧바로 미국으로 날아갔다. 4년간 마이너리그에서 고생하며 기량을 갈고 닦은 뒤 2005년 마침내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이후 시애틀 매리너스, 클리블랜드, 신시내티 레즈 등을 거치면서 공·수·주를 겸비한 외야수로 이름을 날렸다. 2013시즌을 마친 뒤 텍사스 레인저스와 7년 총액 1억 3000만 달러(약 1480억 원)의 초대형 계약을 했다.
계약이 종료된 올해는 특별지명권을 보유하고 있던 SSG 랜더스와 계약해 처음으로 한국에서 뛰게 됐다. 그의 올해 연봉은 KBO리그 사상 최고액인 27억 원이다. 친구 이대호(25억 원)가 보유하고 있던 종전 기록을 2억 원 넘어섰다. 추신수는 또 한국에서 첫 시즌부터 1982년생 친구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됐다.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대표팀에서 함께 뛴 동갑내기 외야수 김강민이다. 둘은 클럽하우스에서도 바로 옆 라커를 쓴다. 추신수가 김강민에게 “귀찮더라도 많이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김강민은 “걱정 말라”고 화답한 덕분이다.
오승환은 일본프로야구(NPB)와 메이저리그에서 모두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2005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신인왕과 한국시리즈 MVP를 석권한 그는 KBO리그 역대 한 시즌 최다 세이브(47개)와 통산 최다 세이브(277개) 기록을 모두 갈아치운 뒤 2014년 일본으로 날아갔다. 한신 타이거즈에서도 센트럴리그 구원왕에 오르면서 한국 최고 소방수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는 2016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계약해 메이저리그 마운드까지 밟았고,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콜로라도 로키스에서도 불펜의 주축으로 활약하다 지난해 삼성으로 복귀했다. 3월 25일과 26일 시범경기에서 삼성 오승환과 SSG 추신수의 KBO리그 첫 맞대결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오승환은 “추신수는 몸쪽 직구에 무척 강하다. 돌직구는 피하겠다”고 농담했다.
이대호도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버펄로스,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메이저리그 시애틀에서 활약했다. 특히 소프트뱅크 시절이던 2015년엔 일본시리즈 MVP에 오르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일본 생활 4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2016년 시애틀에서 메이저리그 타석까지 경험한 그는 2017시즌을 앞두고 롯데 자이언츠로 돌아오면서 4년 총액 150억 원을 받았다.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역대 자유계약선수(FA) 최대 규모 계약이다.
김태균은 2010년 일본 프로야구 지바롯데 마린스에서 뛰었다. 그해 퍼시픽리그 올스타로 뽑혀 홈런레이스 1위에 오르기도 했고, 일본시리즈에서도 맹활약해 팀 우승에 기여했다. 2011시즌 도중 팀을 떠나 한화 이글스로 복귀했다.
각각 롯데와 한화의 4번 타자로 맞대결을 펼치던 이대호(왼쪽)와 김태균은 국가대표팀에서는 동료로 호흡을 맞췄다. 사진=연합뉴스
#국가대표 4번 타자들 라이벌 역사
이들 중 이대호와 김태균은 KBO리그를 가장 뜨겁게 달군 라이벌이었다. 추신수는 메이저리그에서 뛰었고, 오승환과 정근우는 포지션과 스타일이 달랐지만, 이대호와 김태균은 우타 거포 1루수라는 공통점이 있다. 각각 고향팀 롯데와 한화의 4번 타자로 자리를 지키면서 국가대표 4번 타자 경쟁도 펼쳤다.
출발은 김태균이 좋았다. 2001년 프로 입단 직후, 김태균은 이대호를 성큼성큼 앞질렀다. 첫 해에 타율 0.335에 홈런 20개를 때려내면서 당당히 신인왕 타이틀을 따냈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3년 연속 3할 타율도 기록했고, 늘 팀의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반면 롯데에 투수로 입단했던 이대호는 오랫동안 진흙 속에 묻혀 있었다. 첫 번째 FA 자격(2012년)을 김태균보다 2년 늦게 얻은 이유다. 그러다 타자로 전향한 2004년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홈런 20개와 68타점을 기록하면서 서서히 스퍼트를 올렸다.
2006년은 ‘이대호의 해’였다. 1984년 이만수 이후 22년 만에 처음으로 타자 트리플 크라운(타율·타점·홈런 1위)에 올랐다. 마침내 그간의 설움을 털고 최고 타자로 우뚝 섰다.
그렇다고 김태균이 숨죽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8년 홈런왕과 장타율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2009년 WBC에서 홈런 3개와 11타점을 올리면서 ‘월드 베스트10’에 포함되기도 했다. 2009시즌을 끝으로 FA가 된 김태균이 거액을 받고 일본에 진출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김태균이 떠난 국내 프로야구에 이대호의 적수는 없었다. 2010년 이대호는 타율·타점·홈런·최다안타·출루율·장타율·득점 1위를 휩쓰는 사상 최초의 타격 7관왕에 올랐다. 김태균이 지바 롯데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일조하며 이름값을 하던 시기다.
그러나 2012년 김태균이 한국으로 돌아오고 이대호가 일본으로 떠나면서 둘의 길은 엇갈렸다. 이대호가 복귀한 뒤에도 둘은 각자 팀의 간판스타로 군림했지만, 세월의 흐름은 막지 못했다. 김태균은 지난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나 해설위원으로 새 인생을 시작했다. 한국 프로야구의 값진 한 시절에 마침표를 찍는 듯한 은퇴였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회장 역할을 하다 판공비 논란에 휩싸였던 이대호는 롯데와 2년 재계약하고 마지막 명예회복을 노리고 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