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전주시 국민연금공단. 사진=연합뉴스
#정치권 개입에 ‘CIO’ 잔혹사
올 초 국민연금의 운용 자금이 800조 원을 넘어섰다. 일본의 공적연금펀드(GPIF), 노르웨이 국부펀드(GPF) 등에 이어 세계 3위 연기금이다.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주식 비중은 21.2%로 176조 6960억 원을 굴리고 있다. 코스피는 3000선을 진입하며 시가총액 2000조 원을 상회한다. 국민연금이 보유한 국내 주식에서 코스닥 비중은 2%대에 불과하다. 단순 계산하면 국민연금은 코스피 전체 상장사의 지분을 각각 8%씩 보유한 대주주란 얘기다.
국내 증시에서 막강한 힘을 지닌 만큼 잡음도 끊이지 않는다. 재계에서는 정치권이 국민연금을 활용해 기업의 경영 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시장경제 원리가 훼손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반면 노동계와 시민단체는 적극적인 경영권 개입을 통해 윤리 경영을 강화하고 기업 및 주주가치 제고에 힘써야 한다고 반박한다. 이 같은 팽팽한 입장 차이 속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곳이 수탁위다.
국민연금은 증가하는 기금을 전문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1999년 기금운용본부를 설립했다. 사진=국민연금 제공
수탁위의 탄생 과정에서 먼저 짚어봐야 하는 자리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이다. 기금운용본부는 기금을 전담해서 운용하는 곳이다. 하지만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의 역사는 수난의 역사로 요약된다.
1999년 기금의 전문적 운용을 위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설립됐다. 안효준 현 CIO까지 총 8명이 임기를 시작했지만, 조국준·이찬우 전 CIO만 임기 3년을 마쳤다. 남은 CIO들의 임기는 순탄치 못했다. 조국준 전 CIO마저도 임기 중 사표를 제출하면서 논란이 인 바 있다. 당시 조국준 CIO가 제출한 사직서에는 “금융 비전문가인 관료들의 관습과 지배 아래서 나의 법적 지위와 권한으로는 기금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없다”고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선영 초대 CIO는 손절매를 하지 않았다며 감사원으로부터 해임권고를 받았다. 이를 둘러싼 정치적 공방이 거세지자 임기 3개월을 남겨두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시 김선영 CIO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장기적으로 자산을 굴리는 연기금이 왜 손절매를 해야 합니까. 연기금조차 주가가 좀 떨어졌다고 팔라고 하니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증시를 좌지우지하는 겁니다”라고 털어놨다. 오성근 전 CIO는 노무현 정부가 끝나고 중도사퇴했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여당이 총선에서 압승했고, 곧바로 대규모 인사 물갈이가 진행되면서다.
박근혜 정권 때 CIO의 고난이 제일 극심했다. 2015년 최광 전 이사장은 보건복지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홍완선 전 CIO에게 ‘연임 불가’ 방침을 통보했다. 정부와 이사장의 알력 싸움에 홍완선 전 CIO의 등만 터진 셈이다. 특히 홍완선 전 CIO는 문형표 전 이사장과 함께 박 전 대통령 지시를 받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부당 개입’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현재 대법원의 판결만 남겨둔 상태다. 강면욱 전 CIO는 안종범 전 청와대 수석의 고등학교·대학교 후배로 임명 때부터 논란이 일었다. 이듬해 임기 2년도 채우지 못하고 중도사퇴했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사진=일요신문DB
#‘수탁위’의 독립성은 어디까지 완성됐나
국민연금은 국정농단 사태 이후 정치권·정부의 개입을 막고자 독립적인 외부기관을 설립했다. 수탁위가 그 주인공이다. 수탁위는 2018년 7월 30일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면서 생겨났다. 기존의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를 자문하던 ‘의결권 행사 전문위’를 확대·개편한 것이다.
주요 상장 기업들은 수탁위 행보에 촉각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수탁위 위원들은 주요 기업들의 주주총회 안건을 가져와서 의결권 행사 방향을 논의하고 그 결과대로 의결권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내부 투자위원회가 판단하기 곤란한 안건을 수탁위에 요청하거나, 수탁위 재적위원 3분의 1 이상이 수탁위에 회부할 것을 요구하면 수탁위에서 의결권 행사방향을 결정한다.
수탁위는 기업의 △배당정책 △임원 보수한도 적정성 △법률 위반 우려로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익 침해 사안 △계속 반대의결권 행사해도 개선 없는 사안 등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등을 중점관리사안으로 선정해 수행하고 있다. 2019년 기준 수탁위가 책임투자를 고려하는 국내주식 운용 규모는 32조 원에 이른다. 직접운용 중 책임투자 적용이 약 26조 9800억 원, 위탁운용 중 책임투자 적용이 약 5조 1900억 원이다. 국민연금은 내년 전체 운용 자산의 절반을 책임투자 방식으로 운용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수탁위가 완전한 독립을 이루진 못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3월 16일 삼성전자 주총 안건을 두고 수탁위와 국민연금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갈등은 홍순탁·이상훈 위원의 사퇴로 이어졌다. 전날 재적 위원의 3분 1인 홍순탁·이상훈·전창환 위원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 삼성전자 주총 안건에 대한 의결권 행사를 수탁위 회의에 상정하겠다고 전달했다. 하지만 기금운용본부가 이를 무시하고 예정대로 ‘찬성’ 의결권을 행사한다고 공시하면서 갈등이 촉발됐다.
기금운용본부는 “판단하기 곤란해서 수탁위에 결정을 요청할 사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며 “3월 10일 투자위원회가 결정한 의결권 행사방향을 그대로 했을 뿐”이라고 반론했다.
안건 회부 등에 있어서 정치권의 입김에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례로 지난 2월 15일 이낙연 대표는 “국민연금은 포스코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국민기업이 되도록 스튜어드십 코드를 제대로 실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2월 22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산업재해 청문회를 개최하고 건설·제조·택배 대기업 수장들을 증인석에 불러 세웠다. 특히 최정우 포스코 회장에 대한 집중포화가 쏟아졌다. 결국 수탁위는 최정우 회장의 연임 안건을 수탁위에 회부해 논의했다. 3월 9일 수탁위는 최정우 포스코 회장의 연임 반대 사유가 명확하지 않다며 중립을 결정했다.
다음날인 10일 정치권에선 비판이 쏟아졌다.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민연금이 포스코의 부실 경영을 나 몰라라 한다는 것은 국민 자산을 운영하는 기관으로서 책임의 방기이자 직무유기”라고 꼬집었다. 정호진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산재예방과 안전책임에 소홀한 기업인에게 더 이상 기업경영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수탁위의 결정을 비판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