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은 부산에서 TM마린이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대욱 대표가 맡고 있다. 서능욱 9단, 양재호 9단, 부산 지역 프로기사들과 학생 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김 대표는 대한바둑협회 이사와 한국기원 이사를 맡는 등 젊은 시절부터 바둑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억대의 우승상금이 걸려있는 바둑대회도 많지만 굳이 대주배 이야기를 꺼낸 것은 대주배에는 대회마다, 또는 대국마다 사연이 들어있어서다.
조훈현에게 이길 수만 있다면 영혼을 팔아도 좋다고 생각했다던 서능욱 9단(오른쪽). 대주배에서 조훈현, 서봉수(왼쪽)를 결승에서 거푸 꺾고 평생의 한을 풀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2010년 열린 제1회 대회는 만 50세 이상의 프로기사들만 참가하는 추억의 올스타전이었다. 올스타들이 다 모이긴 했지만 그들 모두는 엄연히 ‘조서(曺徐)의 시대’를 지나왔다. 결국 조훈현 9단과 서봉수 9단이 결승에서 다시 만났고 조 9단이 우승 타이틀 하나를 추가하며 대회가 마무리됐다.
대주배는 2회 대회부터 본격적인 사연을 갖기 시작한다. 2회 대회에서도 조훈현이 결승에 올랐다. 맞은편엔 역시 서…. 그런데 이번엔 서봉수가 아니고 서능욱 9단이었다. 만 14세에 천재 소리를 들으며 프로가 되고도 단 하나의 타이틀도 따내지 못한 비운의 사나이. 조훈현과의 결승전 12번의 승부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한 만년 준우승자. 그가 4강에서 서봉수를 꺾고 결승에 올라온 것이다.
숱하게 조훈현에게 당해온 서능욱은 그날도 종반까지 불리한 상황이었다. 다들 ‘이번에도 역시…’라고 생각한 그 순간, 조훈현이 대마의 안전을 확인하는 선수 행사를 빼먹었고 서능욱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리고 재빠른 손속으로 조훈현의 대마를 덮쳐갔고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확인한 조훈현은 멋쩍은 웃음으로 선선히 돌을 거두었다.
입단 40년 만에 서능욱의 첫 우승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복기 때도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던 그는 대국 뒤 인터뷰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첫 우승도 좋았지만 만약 결승전 상대가 조훈현 9단이 아니었다면 의미가 달랐을 것이다. 조훈현을 이길 수만 있다면 영혼을 팔아도 좋다고 여겼던 때가 있었으니까…”라고 말했다.
한번 코를 뚫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다음부터는 오히려 쉽다. 서능욱도 그랬다. 이듬해 3회 대회에서도 서능욱은 결승에 올라갔고, 이번엔 또 다른 벽으로 군림하던 서봉수를 물리치고 대회 2연패를 달성한다. 대주배 김대욱 대표가 서능욱의 절친이라더니 친구의 40년 묵은 한을 톡톡히 풀어준 셈이 됐다.
주최사 사정으로 5년을 쉰 대주배는 2018년 다시 문을 열었는데 이번에는 현해탄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온 조치훈 9단이 화제였다. 일본에서 줄곧 활약하던 조치훈은 그동안 단체전과 이벤트 대회 등에 여러 차례 참가했지만, 세계대회를 제외한 국내 공식 기전에 참가한 건 대주배가 처음이었다. 주최사 초청 자격으로 예선을 면제받은 초대기사 조치훈은 본선 16강부터 김혜민 8단, 이민진 8단, 서능욱 9단을 차례로 꺾고 결승에 올라 조혜연 9단에게 승리를 거두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조치훈은 바둑이 끝난 뒤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열리는 시합에서 우승해서 더 기쁘다. 오늘 기분 좋게 술 한잔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여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간 그가 50여 년 만에 고국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대주배 우승으로 조치훈의 통산 타이틀 개수는 일본 최다인 75회로 늘어났다.
여자 바둑계를 대표하는 라이벌 박지은(왼쪽)과 조혜연의 25번째 대결도 대주배에서 성사됐다. 사진=한게임바둑 제공
5회 대회부터는 조혜연 9단의 활약이 남달랐다. 여자 기사들에게 문을 개방한 이후 조혜연은 3년 연속 결승에 올랐다. 5회 결승에서는 조치훈 9단에게 우승컵을 넘겨줬고, 6회 결승에서는 최규병 9단에게 우승컵을 헌납하며 2년 연속 정상 직전에서 분루를 삼켰다.
하지만 조혜연은 포기하지 않았고 삼세 번째인 작년 7회 대회 결승에 올라 김영환 9단을 꺾고 정상에 올라섰다. 현재 서울 강남에서 PBA 바둑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는 조혜연은 후진양성에 돌입했지만 승부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8회째를 맞은 대주배는 올해도 사연 많은 이들의 뜨거운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첫 번째로 국내 여자바둑계의 영원한 라이벌 박지은과 조혜연의 25번째 대결이 눈길을 모았다. 두 살 차이인 박지은과 조혜연은 1997년 봄 조혜연이, 가을에 박지은이 차례로 입단하면서 여자바둑계를 대표하는 라이벌로 함께 성장해 왔다. 통산 우승 횟수는 박지은이 7회, 조혜연이 5회. 상대전적은 조혜연이 15승 9패로 앞서 있는데 25번째 대결에서도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하다가 조혜연이 반집으로 웃었다. 둘 사이에서는 첫 반집승부였다.
부녀기사인 권갑용 9단과 권효진 7단이 나란히 본선에 이름을 올린 것도 눈길을 끌었다. 대진표 양쪽으로 나뉘어 있어 결승에서나 만날 수 있었는데 권갑용 9단이 서봉수 9단에게 막히면서 부녀대결은 무산됐다. 권효진 7단의 8강전 상대도 난적 유창혁 9단. 하지만 권효진 7단도 최근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열심히 연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승부가 예상된다.
나란히 4강에 올라있는 서봉수 9단과 ‘영환도사’ 김영환 9단의 대결도 눈길을 끈다. 시니어 기전의 단골 우승후보 서 9단이 아직 우승컵이 없다(준우승만 2회)는 점도 신기하고, 시니어 중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김 9단이 지난해 준우승의 아쉬움을 떨쳐낼 수 있을지도 관심거리다.
상대전적은 서 9단 기준으로 7승 4패. 김영환은 “서 9단을 상대로 성적이 안 좋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서 9단과의 대국은 굉장히 오랜만인데 그나마 마지막에 둔 대국에서는 이긴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다”고 답했다. 실제 가장 최근 대국에서는 김영환이 2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이번에는 어떨지….
새로운 우승자가 탄생할 때마다 숱한 이야기 거리를 낳고 있는 ‘대주배 남녀 프로시니어 최강자전’ 올해는 어떤 스토리를 갖고 있는 우승자가 팬들을 즐겁게 해줄지 궁금하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