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산어보’로 4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배우 변요한은 지난 3월 18일 열린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밝혔다. 사진=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굉장히 감사하고 또 기쁨이 담긴 눈물이었던 것 같아요. 오랜만에 기자님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데 예전 생각도 나고 해서 기쁘더라고요. 또 영화가 주는 메시지도 그렇고…. 사실 저도 그날 처음 본 거거든요. 기다리고 설렜던 만큼 좋은 영화가 나온 것 같아서, 눈물을 참으려고 했는데 보니까 뒤에 경호하시던 분도 눈물을 훔치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아, 흘려도 되겠다 싶어서 과감하게 제 감정에 솔직해졌죠.”
극 중 변요한은 ‘세상의 끝’으로 불리던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설경구 분)과 일방적인 대립에서 사제로, 그리고 벗으로 지위 고하와 나이 차를 떠난 관계를 맺는 흑산도의 청년 어부 ‘창대’ 역을 맡았다. 실제 ‘자산어보’에도 정약전이 책을 쓰는 데 전문적인 물고기 지식과 조언을 전한 인물로 전해진다.
“창대가 바라볼 때 약전은 처음엔 사학죄인으로, 또 스승님이 됐다가, 나중에는 벗이 되죠. 영화가 끝난 뒤에 저는 그가 아버지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총평으로 하자면 ‘좋은 어른’이죠. 제 아버지도 좋은 어른이시거든요. 선생님 이전에 모든 것들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어른이었다, 그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정약전을 바라보는 창대의 시각 변화는 변요한의 연기력과 그대로 맞닿아 있었다. 화려한 시각 또는 음향 효과로 관객들의 눈을 조금이나마 속일 수 있지만 ‘자산어보’는 흑백영화다. 파도소리와 바닷바람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스크린 속 흑과 백으로 칠해진 배우들의 얼굴만이 고스란히 클로즈업되는 작품인 만큼, 그 미묘한 변화를 과하지 않게 표현해내는 것이 그에게 있어 가장 큰 숙제였다.
더욱이 창대가 기록된 유일한 문서인 ‘자산어보’ 속에서 그는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청년 어부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묘사되지 않았던 터라 이 인물의 변화를 어떻게 설득력 있게 표현할지 고민을 거듭했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이준익 감독의 조언은 해답 그 자체로 다가왔다.
흑백영화, 그것도 사극 출연을 결정한 것은 변요한에게도 무모하지만 가치있는 도전이었다. 사진=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제가 직전 인터뷰에서 ‘흑백영화는 색채감이 없다’고 언급했었는데 그게 기사에 ‘섹시함’으로 잘못 나갔더라고요(웃음). 섹시함이 아니라 색채감이라고 정확하게 말씀드립니다(웃음). 색이 없으니 주변 풍경의 형태들이나 배우의 눈빛, 그런 것으로 묘사될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조금 겁이 나기도 하더라고요. 창대를 연기해 나가려니 막막했어요. 분명히 나와 닮아있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런 상황에서 첫 촬영 때부터 바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건 감독님의 ‘뭘 하려고 들지 마라’는 말씀이었어요. ‘좀 서툴더라도 거짓말하지 말자’라는 말씀처럼 들리더라고요. 딱 맞아떨어지는 연기가 아니라 좀 서툴더라도 창대가 창대로서 말할 수 있도록 오로지 집중했던 것 같아요. 그랬더니 좀 더 수월해지고 집중할 수 있었죠.”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라는 ‘자산어보’의 대표 문구처럼, 그리고 약전과 창대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깊이 아는 것에 나이와 직위는 걸림돌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변요한은 “서로에 믿음이 있다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경험에서 우러난 단호함이었다.
“저는 나이나 직위가 친구를 사귀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나이가 어리든 더 세월을 사셨든… 창대나 약전처럼 신분, 이런 건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웃음) 그래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서로에 믿음이 있고 진실 된다면, 서로 운명적으로 만난다면 그런 게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이준익 감독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그런 친구는) 실수도 눈감아줄 수 있어야 되고, 장애물들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면, 제가 그런 친구를 이미 만났거든요.”
변요한은 영화 ‘자산어보’ 속 창대를 연기하며 정약전(설경구 분)과의 관계 변화를 점진적으로, 설득력있게 표현해 냈다. 사진=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변요한은 인터뷰에서 특히 ‘좋은 어른’이라는 말을 자주 언급했다. ‘자산어보’를 통해 만난 이준익 감독도, 상대역인 설경구에 대해서도 그는 “좋은 어른들을 많이 만나서 마음의 부자가 된 기분”이라며 자신에 대한 뿌듯함과 동시에 상대에 대한 애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가 말한 ‘좋은 어른’은 어떤 어른일까.
“이 좋은 어른이라는 게 말은 쉽지만, 반대로 되게 어렵기도 하죠. 누군가는 ‘단점을 지적해줘야 변화하지’ 하시겠지만 오히려 장점을 보고 약점을 눈감아 주는 게 쉽지 않단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저도 해보려고 해도 안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하시는 분들을 만났어요. 이게 과연 성향일까 기질일까, 아니면 ‘척’일까 싶었는데 다 아니더라고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긴 저도 말주변이 뛰어나지 않아서 서툴지만, 결국 그건 ‘지켜주는 것’인 거죠. 그냥 믿어주고, 이해해주고, 눈감아주고 하지만 좋은 것들은 용기 내게 해주고… 그런 게 좋은 어른인 것 같아요. 저는 지금까진 그렇게 정의를 내렸어요.”
그런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변요한은 정식 데뷔년도를 기준으로, 햇수로 딱 10주년을 맞이했다. 좋은 어른이 돼야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어느 한 쪽이 되는 것을 성공한다면 자연스럽게 다른 한 쪽으로도 살 수 있는 것일까. 누군가에겐 다를 수 있겠지만 변요한에게 만큼은 좋은 배우가 되는 것이 곧 좋은 어른이 되는 것과 같은 선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이야기다.
“저는 연기가 너무 좋아요. 연기에 대한 제 마음이 변치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연기를 너무 많이 사랑하거든요. 이제는 (배우라는 직업이) 큰 책임감으로 몰려올 때도 있어요. 제게 조카들이 굉장히 많은데, 이런 젊은 세대들에게 좋은 메시지가 있는 작품으로 다가가고 싶거든요. 문화라는 게 정말 큰 작용을 하고 있잖아요. 제 가족이나 주변분들, 제 조카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고 영감을 얻고, 더 좋은 문화와 환경 속에서 풍요롭게 살길 바라요. 그렇게 되도록 저는 배우로서 온전하게, 잘 살아가고 싶습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