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정치권이 ‘책사 3인방’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여당 이해찬·야당 김종인·제3지대 김한길’이 대표적이다. 올드보이 귀환이라는 비판부터 판을 뒤집는 신의 한 수라는 명암이 공존한다. 이들의 구원등판이 성공적이면, 킹메이커 부활로 평가받을 전망이다. 그러나 자칫 악성코드인 트로이 목마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들은 ‘모 아니면 도’인 도박 같은 카드다. 명암도 엇갈린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해찬 흐림·김종인 맑음·김한길 안갯속’이다.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20년 9월 22일 오전 서울 중구 웨스턴조선호텔에서 열린 ‘나의 인생 국민에게’ 발간 축하연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이들의 1차 승부처는 4·7 재보궐 선거, 2차 승부처는 재보선발 정계개편, 마지막 승부처는 내년 3·9 대통령선거다. 이번 재보선 과정에서 타격을 입은 쪽은 사실상 킹메이커 역할론에 마침표를 찍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재보선 최후 승자는 탄탄한 입지를 확보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포스트 재보선 정국에서 필연적으로 발발할 정계개편은 넘어야 할 산이다.
1차 승부처 양대 축은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다. ‘33년 악연’인 이들은 또다시 미니 대선 길목에서 정면충돌할 전망이다. 이해찬-김종인 외나무다리 혈투는 그간 집필에 전념하던 이 전 대표가 선거 링에 오르면서 성사됐다. 그는 3월 17∼19일까지 친여 성향 유튜브와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서울시장 보궐선거 판세에 대해 “거의 다 이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8월 대표직에서 물러난 지 7개월 만에 다시 등판했다.
파장은 컸다. 이 전 대표의 아슬아슬한 발언 수위는 선거 정국을 흔들었다.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를 향해선 “MB(이명박 전 대통령) 키즈”, “내곡동 이익을 다 해먹은 자영업자”라고 힐난했다. 부산시장 보선에 나선 박형준 국민의힘 후보에 대해선 “언급할 거리도 되지 않는다”고 평가 절하했다.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해선 “스스로 커나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야당에선 이 전 대표를 ‘친문(친문재인) 상왕’으로 지칭하며 “참전을 진심으로 환영한다(조수진 의원)”고 맞섰다. 또한 “승리 호소인이냐. 좀스럽고 민망해서 더는 언급을 안 하겠다(김웅 의원)”, “윤리적 불감증이 당황스러울 정도(윤희숙 의원)” 등의 날선 발언도 쏟아졌다.
여권 내부 반응은 엇갈렸다. 당 주류 측에선 “지지층 결집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낙관론을 폈지만, 비주류 측에선 “중도층 확장이 더 어려워졌다”고 우려했다. 친문계 관계자들 말을 종합하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이 전 대표가 예상보다 일찍 등판한 것은 ‘지지층을 투표장으로 유인’하려는 전략적 행보다.
국민의힘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3월 23일 서울 마포구 DMC첨단산업센터에서 열린 중소기업위원회 현장간담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국회사진취재단
최근 양자대결에서 박영선 민주당 후보가 두 자릿수로 격차로 밀리자, 지지층이 기권할 것을 우려해 발언 수위를 높였다는 것이다. ‘선 지지층·후 중도층’ 공략을 통해 여야 후보의 지지도 격차를 줄이는 구원투수 역할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미니 대선전에서 패배할 경우 자신이 띄운 ‘20년 집권론’이 물거품 될 수 있다는 위기론도 전격 등판에 한몫했다고 한다. 이번 서울·부산시장 선거에서 참패할 경우 문재인 대통령 레임덕(임기 말 권력누수)→친문 분화 가속화 등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여권 전체가 후폭풍에 휩싸일 공산이 크다. 친문 적자 찾기는커녕 당 주류의 사분오열로, 당내 권력구도마저 비주류에 내줄 수도 있다.
이에 비문(비문재인)계 내부에선 “지지층만으로 선거를 치를 것이냐”라며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중도층 확장 없이는 선거 승리가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앞서 민주통합당(현 민주당)은 2012년 대선이 한창인 10월 22일 3철(양정철·전해철·이호철)을 포함한 친노(친노무현) 핵심 인사 9명의 백의종군 카드를 전격 꺼냈다. 야권 단일화 협상 대상자였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측이 이들의 용퇴를 촉구하자, 민주당 지지층과 중도층을 묶기 위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친노 한 관계자는 “친노 직계 중 김경수 경남도지사(당시 수행1팀장)만 잔류했었다”고 회고했다. 문 대통령 결단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18대 대선에서 패하면서 이 전 대표의 입지는 그 전보다 좁아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서울과 부산시장을 야권에 뺏긴다면, 이해찬 역할론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으로 보인다. 만에 하나 9회 말 투아웃에 역전 홈런을 칠 경우엔 차기 대선 국면에서 킹메이커 역할을 부여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야권 단일화 승부에서 매직을 발동한 김종인 위원장은 3월 24일 호남을 찾아 사실상 대선판 깔기에 나섰다. 한때 김종인 비대위를 흔들던 목소리가 쏙 들어간 채 당 내부에선 재추대론이 힘을 받고 있다. 김 위원장은 “내가 할 수 있는 기여는 90% 다 했다”며 재추대론에 선을 그었지만, 본선마저 승리할 땐 명실상부한 제1야당 사령탑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야권 단일화 과정에서 김 위원장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연이어 도발한 것에 대해 보수 진영에선 협상용 전략이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안 대표가 ‘김종인 상왕론’을 거론하며 발끈한 것을 두고도 김 위원장 유도 전략에 말렸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안 대표는 정치적 변곡점마다 승부수를 던졌지만, 김 위원장 되치기에 당했다. 지난해 말 가장 먼저 서울시장 출마를 공식화한 안 후보는 야권 후보 원샷 경선, 2월 중 단일화, 야권 통합 정당 등을 띄웠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3자 구도라도 이긴다” “3월이라도 충분하다” “안 대표가 입당하라” 등으로 방어막을 치면서 안철수 승부수를 무력화했다. 야권 단일화 룰에 합의한 직후에도 김 위원장은 “오 후보가 반드시 이긴다”라고 단언했다.
보수진영 안팎에선 김 위원장 협상술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벼랑 끝 전술과 유사하다고 분석한다. 오 후보에게 유리한 평일 여론조사를 밀어붙인 것도 김 위원장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2012년 총·대선 때 새누리당 승리에 기여한 김 위원장은 4년 뒤 민주당 비대위를 이끌며 친정 당을 격침했다. 김 위원장이 ‘정치권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김 위원장은 예선전 승리로, 자신의 퇴진을 촉구한 홍준표 무소속 의원과 김무성·이재오·김문수 전 의원 등 4인방의 흔들기를 단숨에 잠재웠다.
김한길 전 의원. 사진=이종현 기자
김 위원장은 야권 단일화 승리 후 안 대표의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해 “정권교체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야권단일정당 창당의 험로를 예고한 대목이다. 재보선 결과도 변수다. 파죽지세인 김 위원장이 본선에서 예상 밖 패배를 한다면, ‘김종인 리스크’가 재부상할 수밖에 없다. 여론조사 전망대로 승리하더라도 야권발 정계개편 과정에서 김종인 리스크가 발발할 가능성도 있다.
갈림길에 선 윤 전 총장 선택에 이목이 쏠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야권 안팎에선 단일화 승리 직후 “내 역할은 끝났다”고 말한 김 위원장의 말을 주목하고 있다. 김 위원장이 윤 전 총장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시그널이란 분석도 나온다. 그간 여의도 안팎에선 ‘김종인·윤석열 6월 연대설’이 끊이지 않았다. 김 위원장이 야권발 정계개편의 막이 오르는 6월 윤 전 총장의 멘토 역할을 통해 킹메이커로 부상한다는 게 6월 연대설의 핵심이다.
여기서 부딪히는 것은 제3지대론자인 김한길 전 의원이다. 조수진 국민의힘 의원은 “2013년 국정감사 때부터 윤 전 총장과 김 전 의원 등이 친분이 있었다”라고 전했다. 윤 전 총장과 정동영 전 의원이 끈끈한 사이라고 전한 정대철 전 민주당 상임고문과의 통화 내용도 공개했다. 김한길·정동영 전 의원은 민주당 시절부터 반문 구심점이었다. 김 전 의원이 창당 전문가라는 점도 양측이 충돌할 수 있는 지점으로 꼽힌다. 김 위원장은 그간 제3지대에 대해 “성공한 사례가 없다”고 일축했다.
반면 김대중(DJ) 전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던 김한길 전 의원은 2007년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시작으로, 고비마다 신당 창당 구축에 나섰다. 2013년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깜짝 합당과 2016년 국민의당 창당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신분이었던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김 전 의원을 향해 “정당 브레이커(파괴자)”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야권 안팎에선 “윤 전 총장을 제1야당으로 끌어들이려는 김종인 위원장과 제3지대에 머물게 하려는 김한길 전 의원의 힘겨루기가 야권발 정계개편의 승부처”라는 말도 나온다. 다만 야권 단일화 대결에서 승리를 이끈 김 위원장이 한발 앞서 윤 전 총장과의 접점 찾기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킹메이커 3인방의 대선 게임이 초읽기에 들어간 셈이다.
윤지상 언론인